존 버거 John Berger (1926.11.5-2017.1.2)



◼︎ John Berger, art critic and author, dies aged 90 [The Guardian 2017.1.2]


◼︎ John Berger, art critic and author of Ways of Seeing, dies [BBC 20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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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 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8.13-2016.11.25)





◼︎ Fidel Castro, Cuba’s revolutionary leader, dies aged 90 [The Guardian 201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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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숙 (1960.8.29~2016.3.21)


20101208 국회 본회의장


◼︎ 장애여성인권운동가 곽정숙 전 의원 별세


◼︎ "일 년 남았대" 어느 전직 국회의원의 고백

 [곽정숙 전 의원 인터뷰①] 삶과 죽음 사이... 여성장애인 리더에서 정치인으로


◼︎ 비례대표 1번 제안, 한마디로 거절했다

[곽정숙 전 의원 인터뷰②] 장애여성인권운동가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 "근데 나 오래 살 것 같아"곽정숙이 환하게 웃었다

 [곽정숙 전 의원 인터뷰③] 말기암과 싸우는 그가 남긴 유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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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1941~2016.1.15)


20060921


◼︎ "우리 모두의 '마음의 스승', '시대의 스승'이 떠나셨다" [한겨레 2016.1.16]


◼︎ 신영복의 일생을 사색한다 [프레시안 2016.1.16]


◼︎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 [한겨레 20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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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1942-2015.7.31)






◼︎ '한국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 김수행 교수 별세 [한겨레 2015.8.2]



◼︎ [김종철의 수하한화]김수행, 아름다운 영혼을 기리며 [경향신문 20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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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Gunter Wilhelm Grass (1927.10.16-2015.4.13)


Günter Grass – Biography-Portrait by Ralph Ueltzhoeffer (2012).


 ■ 나치 잔재·이스라엘 핵 비판…할 말 했던 ‘양철북’ 작가 잠들다 [한겨레 2015.4.13]


노벨문학상 귄터 그라스 별세


소설 <양철북>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13일 숨을 거두었다.

소설 <양철북>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13일 숨을 거두었다. 향년 88.


1927년 발트해 연안 항구도시 단치히(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난 그라스는 2차대전 당시 독일군 탱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미군 포로로 1946년까지 잡혀 있던 경험을 소설로 쓴 1959년작 <양철북>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그에게 1999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후 독일 최고 작가로 꼽히지만

뒤늦게 나치 친위대 복무 밝힌뒤

격렬한 논쟁 불러


한국과도 깊은 인연

유신때 DJ·김지하 시인 석방운동

‘한겨레’ 가 주최한 대담에선

“대북지원만이 분단상황 완화”


전후 독일 문학의 최고 작가로 평가받는 그라스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으며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나라 안팎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1990년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심포지엄의 기조연설을 통해 자신이 비판한 것은 “통일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통일을 추구하는가’ 하는 과정과 방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부유한 서독이 가난한 동독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서독인들에게는 동독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겨레> 주최로 김누리 중앙대 교수와 한 대담에서도 그는 “분단의 부담은 대부분 독일의 경우에는 동독 사람들이, 한국에선 북한 사람들이 짊어져야 했다”며 “(한반도의 경우) 남한의 일방적인 대북 지원만이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라스는 1970년대 수감돼 있던 김대중 대통령과 김지하 시인 등의 석방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198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 기조연설에서도 당시 일시적으로 연행되어 있던 소설가 황석영의 처지를 거론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작가였다.


서독 시절 사회민주당 지지자이자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연설문 집필자로서 직접적인 정치적 참여를 마다하지 않은 그는 독일 안팎에서 숱한 논쟁에 얽히기도 했다. 2006년에는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에서 나치의 엘리트 조직인 ‘무장 친위대’ 복무 경력을 밝혀 격렬한 논란을 낳았다. 그가 비록 범죄행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독일 사회의 도덕 교사이자 양심’으로 취급받던 그가 그토록 중요한 사실을 왜 뒤늦게 고백했는가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2012년에는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비판하는 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전범국 독일에서는 금기와도 같았던 ‘반유대주의’를 토론의 장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는 이 시에서 “핵무장 이스라엘이 가뜩이나 불안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며 “이런 사실에 모두가 침묵하는 것은 / (…) / 반유대주의라는 보편화한 판결” 때문이라고 썼다.


그라스는 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삶에 거대하고 결정적인 힘을 행사하는 정치에 대해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 문학은 변화를 가져올 힘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지닌 작가였다.


 나치 잔재·이스라엘 핵 비판…할 말 했던 ‘양철북’ 작가 잠들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686723.html

 ‘정곡 찔린’ 이스라엘 귄터 그라스 입국금지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527531.html

 “나는 나치 친위대였다” 파격 고백 귄터 그라스 자서전 불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50798.html

 귄터 그라스, 송두율교수 석방 촉구편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8&aid=0000041867

 [유레카] 동네북과 양철북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767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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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 (1943.6.28~2014.10.8)




 언론자유 위해 싸운 삶 50년...끝까지 언론인이었다 [한겨레 2014.10.8]



성유보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 별세

유신정권 맞서 동아투위 결성
전두환정권 땐 민주화운동 이끌어
최근까지도 언론자유 위해 활동

성유보(사진)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이 8일 오후 5시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심장마비)으로 별세했다. 평소 심장이 약했던 고인은 지난 4일부터 췌장암으로 인한 황달 치료를 위해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향년 71.

1943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한겨레에서 창간 및 3대 편집위원장, 논설위원 등으로 활약했으며, 방송위원회 상임이사와 방송평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 등으로 일하면서 민주화의 염원을 놓은 적이 없다. 2013년 희망래일 이사장에 이어 201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도 맡아 남북통일과 평화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해왔다.

고인은 68년 <동아일보> 기자가 되면서 50년 가까이 언론인의 한길을 걸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72년 유신체제를 구축한 뒤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는 74년 10월 동아일보의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를 문제삼아 송건호 당시 편집국장 등을 연행했고,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아나운서 등이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놨다. 유신정권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광고 탄압’에 나섰고, 독자들은 익명의 광고 후원으로 이들을 응원했다. 이는 이듬해 기자 대량 해직 사태로 이어지고, 해직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고인은 이 모든 과정에 앞장섰으며, 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뒤에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1986년)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고인은 88년 한겨레 창간 작업에 참여하면서 언론인으로 ‘복귀’했다. 91년 한겨레를 떠난 뒤에도 언론인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92년 <사회평론> 재창간위원장과 이듬해 사회평론사 대표를 맡았고, 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와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을 지냈다. 2000년대 들어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내며 방송 개혁을 이끌었다.

영원한 현역 언론인으로 남고자 한 고인의 열망은 올해에도 이어졌다. 지난 1월부터 한겨레의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를 통해 70~80년대의 어두운 시대를 증언하고 그 교훈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고인은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이라는 부제의 연재물 마지막회(<한겨레> 6월24일치 31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보살이란 뜻이란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또한 그 시대 언론인이었다. 그러므로 한 시대 ‘언론의 자유’는 당대 백성들의 시대적 소망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요즈음 확실히 깨닫고 있다.”

한평생 자유언론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지켜온 칠순의 언론인은 2014년 오늘에도 언론의 자유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토로하면서 이렇게 글은 맺었다. “한국의 21세기 시민사회가 언론자유 쟁취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와 복지와 평화로의 새로운 대행진을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의 문명중심지’로 재탄생할 것이다. 한민족의 새로운 역동성에 희망을 건다.”

언론시민단체들은 9일 낮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발인 일정 등을 정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연희씨와 아들 덕무, 영무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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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차베스 Hugo Rafael Chavez Frias (1954.7.28-2013.3.5)



Postscript: Hugo Chávez, 1954-2013 [The New Yorker 2013.3.5]

 Posted by Jon Lee Anderson


Venezuelan President Hugo Chávez Frias, who died on Tuesday, from cancer, at the age of fifty-eight, was one of the most flamboyantly provocative leaders on the world scene in recent years. His death came after months in which his health was a national mystery, the subject of obfuscation and rumors; he spent inauguration day for his second term in a hospital bed in Cuba. Vice-President Nicolás Maduro, who made the announcement, is one of the politicians now maneuvering to control Venezuela, where elections will be held within thirty days.


A one-time army paratrooper who served two years in prison after leading a botched military coup against Venezuela’s government in 1992, Chávez emerged from behind bars, after an amnesty, with a renewed determination to achieve power, and sought the support of Cuba’s veteran Communist leader Fidel Castro to do so. In 1998, Chávez won Venezuela’s Presidential elections, promising to change things in his country forever, from top to bottom. Since the day he was first sworn in as President, in February, 1999, he devoted himself to doing precisely that. What he has left is a country that, in some ways, will never be the same, and which, in other ways, is the same Venezuela as ever: one of the world’s most oil-rich but socially unequal countries, with a large number of its citizens living in some of Latin America’s most violent slums.


To his credit, Chávez was devoted to trying to change the lives of the poor, who were his greatest and most fervent constituents. He began by hammering through a new constitution and renaming the country. Simon Bolívar, who had fought to unite Latin America under his rule, was Chávez’s hero, and so he changed the country’s name to the Bolivarian Republic of Venezuela, and thereafter spent a great deal of time and resources attempting to forge what he called his “Boliviarian Revolution.” It was not, initially, to be a socialist or even necessarily anti-American endeavor, but over the following years, Chávez’s rule, and his adopted international role, became both, at least in intention.


I met Chávez a number of times over the years, but the first time I saw him was in 1999, shortly after he had become Venezuela’s President, in Havana, Cuba, giving a speech in a salon at the University. Both Castro brothers were in attendance—a rare sight—as were other senior members of the Cuban Politburo. Fidel Castro looked on and listened raptly as Chávez spoke for ninety minutes, essentially laying out the rhetorical groundwork for the intense and deep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the two leaders, that was soon to follow. That day, a number of observers present in the room commented on what appeared to be a major bromance between the two. They were right. Chávez, younger than Fidel by nearly thirty years, soon became inseparable from the Cuban leader, who was clearly a father figure and a role model. (Chávez’s own family was modest and provincial, from the Venezuelan interior.) And for Castro, Chávez was an heir and something like a beloved son. Uncannily, or fittingly, it was Fidel who noticed Chávez’s discomfort on a visit to Havana in 2011, and insisted that he see a doctor—who promptly discovered Chávez’s cancer, a tumor described as the size of a baseball somewhere in his groin area. Since then, and until he returned home in February, terminally ill, Chávez received virtually all of his cancer treatment in Havana, under Fidel’s close scrutiny.


A warm and amiable showman, with a remarkable sense of occasion as well as strategic opportunity, Chávez grew in ambition, and global stature, during the Bush years, in which Latin America was relegated to a back burner for Washington. Chávez was alienated early on by the bellicose rhetoric of the Bush Administration in the post-9/11 period, and became increasingly acerbic about policies and attitudes of the American “empire.” He delightedly ridiculed the U.S. President he called “Danger Man” and “Donkey” and whom he regularly mocked on his weekly television show, “Aló Presidente,” on which he sometimes made governing seem like reality television. (He once ordered his Defense Minister to send Venezuelan forces to the Colombian border live on “Aló Presidente.”)


An attempted coup d’etat by a cabal of right-wing politicians, businessman, and military men in 2002 saw Chávez briefly and humiliatingly detained, before he was freed and allowed to resume office. The coup against Chávez had failed, but not before the plotters had apparently received a wink and a nod from the Bush Administration. Chávez never forgave the Americans. Thereafter, his anti-American rhetoric became more heated, and whenever possible he sought to discomfit Washington. Chávez closed U.S. military liaison offices in Venezuela, and ended coöperation with the 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Even earlier, in 2000, Chávez had flown to Baghdad for a friendly visit with Saddam Hussein. Later on, in his avowed ambition to weaken the U.S. imperio and create a “multipolar world,” he would go on to embrace others with similarly anti-American stances: Iran’s Ahmadinejad was one, Belarus’s Lukashenko was another. He invited Vladimir Putin to send his navy to do exercises in Venezuelan waters, and to sell him weapons. And there was his increasingly chummy, and dependent, relationship with Fidel Castro.


Venezuelan oil was flowing to energy-strapped Cuba, effectively ending the country’s almost decade-long penurious “Special Period” that followed the Soviet collapse and the abrupt end of three decades of generous subsidies from Moscow. Cuban doctors, sports instructors, and security men were soon travelling in the other direction, helping Chávez by staffing some of the programs he called Misiones, aimed at alleviating poverty and disease in Venezuela’s slums and rural hinterlands. Chávez and Castro took trips together, and frequently visited one another’s countries, and it was obvious that they loved one another’s company.


On a visit to Caracas in 2005, shortly after Chávez had announced that he had decided that socialism was the way forward for his revolution and for Venzuela, I saw him in the Presidential palace. He was manic with newfound revolutionary fervor. In a meeting with poor peasant farmers, he announced the seizure of several large private landholdings in the interior, and instructed them euphorically to organize themselves into collectives and farm the confiscated farms. “RAS!,” he shouted happily, repeating it several times. “RAS!” An aide explained that the acronym meant “Rumbo al socialismo”—“Onward to socialism.” It never really panned out, though. Chávez’s attempts at collectivization and agrarian reform seemed ill-planned and out-of-time, somehow, much as he himself often seemed a throwback to earlier times, when Latin America was dominated by willful caudillos, and there was a Cold War with a world clearly polarized.


A couple of years later, I asked him why, so late in the day, he had decided to adopt socialism. He acknowledged that he had come to it late, long after most of the world had abandoned it, but said that it had clicked for him after he had read Victor Hugo’s epic novel “Les Misérables.” That, and listening to Fidel.


Fuelled by billions of dollars from the spike in oil prices, Chávez had gained significant influence in recent years throughout the hemisphere, forming close relationships with a number of emergent leftist regimes that, in some cases, he also subsidized and helped mold, in Bolivia, Argentina, and Ecuador, and with Nicaragua, once again led by the old Sandinista leader Daniel Ortega. He also formed a trade bloc, called ALBA, aimed at countering American economic hegemony in the region. He predicted a waning of U.S. influence and a chance, after all, for a revival of Bolívar’s grand vision. In a sense, Chávez was right. U.S. influence has waned over the past decade or so in Latin America; his timing was good. But in the region, it was not Venezuela but Brazil, finally emergent from its slumber as a regional economic and political powerhouse, that began to fill that vacuum. Brazil’s last leader, Lula, who was also a left-wing populist, also made “the people” and poverty alleviation a priority of his Administration, and, with a better management team and without all the polarizing confrontation with the imperio, he succeeded to an impressive degree. In Venezuela, by contrast, Chávez’s revolution suffered from mediocre administrators, ineptitude, and a lack of follow-through.


What is left, instead, after Chávez? A gaping hole for the millions of Venezuelans and other Latin Americans, mostly poor, who viewed him as a hero and a patron, someone who “cared” for them in a way that no political leader in Latin America in recent memory ever had. For them, now, there will be a despair and an anxiety that there really will be no one else like him to come along, not with as big a heart and as radical a spirit, for the foreseeable future. And they are probably right. But it’s also Chávism that has not yet delivered. Chávez’s anointed successor, Maduro, will undoubtedly try to carry on the revolution, but the country’s untended economic and social ills are mounting, and it seems likely that, in the not so distant future, any Venezuelan despair about their leader’s loss will extend to the unfinished revolution he left behind.


At the tail end of a trip that Fidel and Chávez took together in 2006, Castro fell ill with diverticulitis and nearly died, leading him to resign from Cuba’s Presidency a year and a half later and hand over power to his younger brother Raúl. I was on Chávez’s plane when he flew to Cuba, in early 2008, to congratulate Raúl. In Havana, Chávez vanished, off to visit Fidel, who was still sick and in seclusion. On the flight back the next day, Chávez reported happily to all of us aboard his plane, “Fidel is just fine.” He added, “Fidel asked me to say hello to all of you for him!” Five years later, the Castros, both octogenarians, are alive, and it is Chávez who has passed from the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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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집권 14년의 명암 [경향신문 2013.3.6]


차베스는 집권 14년간 석유를 무기로 국내적으로 사회주의적 개혁조치를 취했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중남미 통합운동을 벌였다. 19세기 베네수엘라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범아메리카주의와 페루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대통령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자본자유화, 탈규제,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차베스의 정책들은 베네수엘라와 그 너머의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션의 나라’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미션의 나라’였다. “예수는 혁명가”라고 말한 그는 선교사의 열정으로 베네수엘라를 바꾸자고 말하곤 했다. 그가 주도한 일련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에는 ‘미시온(misssion·선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네수엘라 석유와 쿠바 의료의 맞교환에 의한 무료 의료 사업은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라 불렸다. 공교육 투자를 대폭 늘려 무상교육을 확대했다. 문맹퇴치를 위한 ‘미시온 로빈손’, 무상 고등 교육인 ‘미시온 리바스’ 등이 그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에 속한 유휴 농지를 시장가격에 사들여 경작 농민에게 제공하는 ‘미시온 사모라’도 시행했다.

‘미시온’을 위한 재원은 석유에서 나왔다. 차베스는 1958년 ‘푼토피호’ 협약이후 40년간 지속된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의 보수양당체제를 끝내고 이들이 독식하던 석유 수입을 빈민층과 중하층으로 돌렸다. 국내총생산의 1/3과 정부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영석유공사(PDVSA)가 그 중심이다. 국영석유공사(PDVSA)의 ‘폰데스빠’라는 기금이 각종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재정을 지원한다.

차베스의 ‘미시온’은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03년 62.1%에서 2007년 33.6%로 줄었고 2011년 31.9%에서 안정화되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3년 3482달러에서 2011년 1만2000달러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남미 개도국들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3470달러에서 8574달러로 상승한 것에 비하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신사회주의’의 명암

차베스의 개혁조치들은 ‘신사회주의 운동’으로도 불린다. 빈곤퇴치와 동시에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연대의 정신에 기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운영, 친환경적 개발 등의 방향이 제시됐다. 그의 개혁입법은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반차베스 쿠데타를 일으킬만큼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반대자들은 그를 독재자로 묘사한다.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김달관 교수는 “독재자라는 말은 우파 기득권 세력의 라벨붙이기”라며 “누구의 독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사회에서 배제되고 타자화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차베스에 우호적인 좌파진영에서도 양극화를 순화시키고 천연 자원에 대한 주권을 강화한 것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완전히 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너무 강력한 국가주의”에는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차베스가 결정하고, 차베스가 발표”하면서 차베스 이외의 대안적 리더십이 자라날 공간도 공동의 토론공간도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적 양극화도 문제다. 차베스 지지층이 결집하며 이룬 대대적인 사회개혁은 그에 못지않게 반대세력도 결집시켰다. 2006년 선거부터 60/40, 49/51, 55/45 식의 대립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석유에 의존하는 한 차베스의 ‘신사회주의 혁명’이 지속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신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김 교수는 “브라질의 룰라가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다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자본주의가 끝난다고 보고 ‘신사회주의’라는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에콰도르나 볼리비아는 1492년 스페인 정복전 원주민들의 방식대로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반미주의와 중남미 통합

차베스는 집권 이후 줄곧 반미 외교를 폈다. 자신의 집권 14년을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부른 것도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남미를 해방시키고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시도했던 시몬 볼리바르처럼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쯤으로 여기며 정치·경제적으로 개입해왔던 미국에 맞서 중남미가 단결해야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미는 극복할 대상과 세력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줘 내부적인 통합과 응집력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했다.

차베스는 석유를 이용해 중남미의 정치적 통합을 시도했다. ‘봉이 김선달’식의 외교였다. 2006년 국유화 조치로 서방 석유사들이 내는 로열티와 법인세를 올려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이미 2000년부터 OPEC과 협력해 석유 감산에 나서 유가를 높여왔기 때문에 추가된 비용에도 이득을 남길 수 있었던 서방 석유사들은 차베스의 조치를 받아들였다. 2005년에는 카리브해 석유동맹인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를 출범시켰다. 석유를 시장가격보다 낮게 공급해 가난한 수입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중남미 통합운동의 실질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중남미가 뭉쳐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의 ‘혁명’이 지속될지 미완에 그칠지는 그간의 사회개혁 조치들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얼마만큼 뿌리를 내렸느냐에 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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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6.9-2012.10.1)

 

 

 

Eric Hobsbawm dies, aged 95 [Guardian 2012.10.1]

 

Lifelong Marxist, whose work influenced generations of historians and politicians, dies after long illness

 

Eric Hobsbawm, one of the leading historians of the 20th century, has died, his family said on Monday.

 

Hobsbawm, a lifelong Marxist whose work influenced generations of historians and politicians, died in the early hours of Monday morning at the Royal Free Hospital in London after a long illness, his daughter Julia said. He was 95.

 

Hobsbawm's four-volume history of the 19th and 20th centuries, spanning European history from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fall of the USSR, is acknowledged as among the defining works on the period.

 

Fellow historian Niall Ferguson called the quartet, from The Age of Revolution to 1994's The Age of Extremes, "the best starting point I know for anyone who wishes to begin studying modern history".

 

Hobsbawm was dubbed "Neil Kinnock's guru" in the early 1990s, after criticising the Labour party for failing to keep step with social changes, and was regarded as influential in the birth of New Labour, though he later expressed disappointment with the government of Tony Blair.

 

Ed Miliband, the Labour leader, described Hobsbawm as "an extraordinary historian, a man passionate about his politics and a great friend of my family".

 

He said: "His historical works brought hundreds of years of British history to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He brought history out of the ivory tower and into people's lives.

 

"But he was not simply an academic, he cared deeply about the political direction of the country.

 

"Indeed he was one of the first people to recognise the challenges to Labour in the late 1970s and 1980s from the changing nature of our society

 

"He was also a lovely man, with whom I had some of the most stimulating and challenging conversations about politics and the world. My thoughts are with his wife, Marlene, his children and all his family."

 

Hobsbawm's lifelong commitment to Marxist principles made him a controversial figure, however, in particular his membership of the British Communist party that continued even after the Soviet invasion of Hungary in 1956.

 

He said many years later he had "never tried to diminish the appalling things that happened in Russia", but had believed in the early days of the communist project that "a new world was being born amid blood and tears and horror: revolution, civil war, famine. Thanks to the breakdown of the west, we had the illusion that even this brutal, experimental, system was going to work better than the west. It was that or nothing."

 

Hobsbawm was born into a Jewish family in Alexandria, Egypt, in 1917, and grew up in Vienna and Berlin, moving to London with his family in 1933, the year that Hitler came to power in Germany. He studied at Marylebone grammar school and King's College, Cambridge, and became a lecturer at Birkbeck University in 1947, the beginning of a lifelong association that culminated in his becoming the university's president.

 

He became a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 in 1978 and was awarded the companion of honour in 1998.

 

He is survived by his wife, Marlene, his daughter, Julia, and sons Andy and Joseph, and by seven grandchildren and one great-grand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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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1947.2.14-2011.12.30)


김근태의 요즘 생각
2012년을 점령하라

세계는 격동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상징되는 잔혹한 유럽의 여름, 월가를 점령하자는 뉴욕의 가을, 그리고 월가점령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공감, 급기야 10월 15일 전 세계 곳곳에서 월가점령시위 동참......

월가점령시위가 확산되자 미국의 언론, 학계,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보수 쪽에서는 폭도라는 말까지 사용해가면 월가점령운동을 폄하하고 있고, 진보 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역사의 순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월가점령에 나선 사람들이 폭도로 여겨지지도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당장 붕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양 진영의 주장이 워낙 강력하고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관계로 자칫 생각과 판단의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월가점령운동에 대한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차분히 묻고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선 미국인들은 왜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치고 있을까.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왜 월가점령에 공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금융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월가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티파티의 압력에 굴복해 길을 잃은 공화당과 의회에 대한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다.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티파티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있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냉혹해서 그들이 공화당을 장악한 티파티 정도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감세가 중지되거나 약간 다시 오르거나 다음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되거나 일뿐이다. 이런 사실을 2008년 촛불집회를 했던 우리는 너무 잘 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한다.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미국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처럼 경선에 뛰어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해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정치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전자가 쉽고 확률도 높다. 비호감일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2011년 10월 김근태

http://gtcamp.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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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길 (1919.9.1-2011.9.25)


봄길 박용길 여사 영전의 감회


                                                고은

기어이 가시는구려
봄길이시여
봄길이시여
늦봄 문익환의 길
봄길 박용길이시여

굳이 슬픔도 소용없습니다
돌아보니
어이 그리도 하나이셨는지요
이른 봄 늦은 봄이 여름으로 가고
가을로 가고
겨울로 오고
또 봄으로 오는길
내 나라 산천 철철의 길
그 길 밖에 또 어느 길이셨는지요

어이 그리도 둘이셨는지요
누가 누구의 것 아니고
누가 누구의 하나로 사그라지는 것 아닌
서로 높여
서로 높고
서로 낮춰
서로 낮고
정녕 끝간데 모를 둘로 엄연하셨지요

사랑일진대
이러하올세라
아니 아픈동지일진대
비바람 속
그러하올세라
문익환이 곧 박용길
박용길이 곧 문익환
그러하고 그러하올세라

지난 날
가시버시 5년만 살다
누가 마저 죽어도 좋다시던
그 젊은 날의 간절한 사랑으로
이 세상 모질고 눈부신 날들을
이토록 잘도 살아내셨지요.
과연 몇십년을
몇백년으로 살아내셨지요
오늘 한동안 소리 하나 없는 대낮에
무슨 미완이 남았으리오

봄길이시여
당신은 늘 사사롭지 않으셨지요
골방의 나 하나도
틀림없이 남남 속의 그것이셨지요
한밤중 잠결에도
무심코 여럿의 마음이셨지요
당신의 지극정성 궁체글씨
한 자
한 자 새겨나가는
내 겨레의 넋들이
꿈틀꿈틀 살아나셨지요

속옷 한 벌 새 것 없는 삶에도
마음은 늘
금방 돋아난
아침 이슬의 새 잎사귀셨지요

늦봄하고
봄길하고 나서는 길
문익환하고
박용길하고 나서는 길
아무리 꼭 막아서도
거기 반드시 문 열리는 꽃
활짝 피어났지요

봄길하고
늦봄하고
마주 앉아 밥 먹는 방
아무리 고단한 하루일지나
여기 싱싱한 새 각시같은
새 서방같은 향내
문밖으로 번져났지요

이제 가시는구려
가서
함께 누워
흙이 되고
하늘이 되는 거기 가시는구려

웬일인지 슬픔도 필요없습니다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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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1929.12.30-2011.9.3)


당신의 죽음을 울지 않습니다 -이소선씨 별세에 부쳐

                                                                                                                    고은

이 세상에 종결은 없습니다
그토록 꿈꾸던
그토록 싸우면서 찾던
다른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꿈도
당신이 한번 더 살아볼 세상도
아직껏 종결이 없듯이
이 세상에 종결은 없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눈 감기 전부터
당신 이후의 후유증이 와버렸습니다
눈 뜬 자
귀 펑 뚫린 자들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가슴 칩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종결없이 다했습니다
엉엉 울고 싶어도
팍팍한 하늘 밑에서
울음이 막히고 맙니다
슬픔이라면
오직 목구멍의 먹먹한 어둠입니다
언제나 찾아가던 당신
언제나 찾아오던 당신
언제나 거기 가면
가장 먼저 와 있던 당신이
이로부터 어디에도 없게 되다니
이게 무슨 노릇입니까

이소선 어머니
당신의 죽음을 울지 않습니다

저 먹통같은 시대 또는 개같은 시대에
생짜로 아들을 묻은 어머니로부터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내내
바람쳐대는 땅 위의 어머니였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한 아들의 어머니이자
한 아들의 무덤인 어머니이자
세상의 뭇 아들의 뭇 어머니로
뼈 앓으며 살 쓰라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에게는 혈육이었고
누구에게는 동지이고
누구에게는 호박넝쿨 울타리이고
누구에게는 심연이었습니다

거듭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 아들 이후의 아들이었고
당신 아들의 어머니 이후
세상의 동서남북 떠도는 어머니였습니다
거기 얼어붙은 평화시장 아스팔트 바닥
그 겨울 이래
당신의 고통은 기어이 불타올라
기어이 영광의 고통이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서 있지 않았습니다
늘 숨차오르며 걸었습니다 내달렸습니다

사람이 사람 아닌 때로부터
당신의 언어는
사람이 사람일 때를 위하여
반생애의 미래 다 바쳐
시퍼런 달밤의 언어였습니다
어제는 위로였고
오늘은 독전(督戰)이었습니다
한번 입을 열면
시작도 끝도 없이
진진한 옛 이야기 같은
오늘 하루의 이야기보따리 보고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새벽같이
저녁같이 부르짖는
그 불덩어리 그때 이래
노동자가
노동자일 때
닭장 아니고 돼지우리 아니고
사람이 두번 세번 사람일 때
그때를 가슴에 담고
빈 몸으로 나아가는 길고 긴 행로였습니다

폭염의 세월이었습니다
혹한의 세월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바친 뒤
그 고통의 꼭대기에서 내팽개쳐진 이래
그럴수록 당신은
조상과 자손의 산천초목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아들의 생모로
만인의 성모로
여기도 저기도 마다 않고
몇 10년 입은 헌 옷차림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런 10년 동안
또 10년 동안
또 10년
또 10년 동안
어느 골짝인들 거르지 않고
바느질로 촘촘히 챙기고
어느 비탈인들
사방풍 안고 파도치는 어머니였습니다
고려의 어머니였습니다
동방의 어머니였습니다
누군가 약해지면 다그쳐
강한 누구이기를
누군가 물러서면 밀어올려
앞장서는 누구이기를
그러는 동안
언제 어디
당신은 마음 푸짐한 밥상이고
질펀한 밭두렁 논두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몇백만의 당신으로
몇백대(代)의 당신으로 섬기는
내일의 추모를 해마다 바칠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 이소선을
우리의 속삭임으로 삼고
우리의 포효로 삼겠습니다
당신의 이름 이소선을
마침내 우리 역사에서
버젓이
버젓이
일으켜 세우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80년을
우리 현대사 시간 속에 응결시킬 것입니다
가소서 가시는듯 오소서

■ “힘내세요…죽지 마세요…하나가 되면 삽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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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훈 (1939.9.13-2011.5.13)


<故 정광훈 의장 약력>

1939년 9월 13일 해남군 옥천면 송운리 출생
1952년 옥천초등학교 졸업
1955년 해남중학교 졸업
1958년 목포공업고등학교 졸업
1966년 12월 최해옥 여사와 결혼
1970년 해남 YMCA 신협 설립 발기인/해남읍 교회 신협 설립 발기인/해남읍교회 중고등부 교사
1972년 해남 YMCA 농어촌 위원장
1977년 故 김남주, 황석영 등과 농민운동 조직화에 나섬
1978년 전남기독교 농민회 총무
1980년 5.18당시 전남기독교농민회 총무로 무안, 해남, 영암, 강진 시위주도
1981년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교육부장
1982년 해남 기독교 농민회 면 협의회 건설 주도
1984년 민중교육연구소 교육부장, 미국농산물 수입 저지 미국대사관 점거 투쟁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부의장/전국수세대책위 교육 선전활동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초대의장
199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
1992년 농민대회 주도 수배 중 구속, 4년간 수감생활(1996년 만기 출소)
1998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의장
1999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200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의장
2002년 전국농민대회 관련 투옥
2003년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WTO 칸쿤회의 반대 한국투쟁단 대표
2005년 APEC반대 국민행동 대표/WTO 반대 홍콩민중투쟁단 대표/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사망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6년 한미FTA저지 미국원정투쟁단 단장/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2007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2007년 한미FTA저지 투쟁관련 3차 투옥
2009년 한국진보연대 고문
2010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11년 민주노동당 고문/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전농 2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2011년 4월 26일 4.27 화순군수 보궐선거 지원유세 후 해남으로 이동 중 교통사고
2011년 5월 13일 오후 8시 51분 조선대학교 병원에서 운명

故 정광훈 민주노동당 고문의 삶과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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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1929.12.2-2010.12.5)


■ ‘실천 지성’ 큰별 지다 [한겨레 2010.12.5]
리영희 선생 별세…민주사회장 8일 영결식

우리 시대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 리영희 선생이 5일 별세했다. 향년 81.
<한겨레> 논설고문과 한양대 교수를 지낸 리 선생은 이날 0시40분께 입원중이던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지병인 간경변으로 눈을 감았다.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 해직당하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된 고인의 평생은 ‘반지성과 반민주에 맞선 역정’이었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69년 베트남전쟁 파병에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하다 6년째 근무하던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한 71년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76년과 80년에는 각각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압력으로 한양대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으며, 방북 취재를 기획한 89년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160일간 복역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고인의 무기는 ‘관념’이 아닌 ‘사실’이었고, ‘이론’이 아닌 ‘실천’이었다.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우상과 이성>(1977)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

유족으로 부인과 2남1녀가 있다. 빈소(02-2227-7550)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민주사회장(장례위원장 고은·백낙청·임재경, 집행위원장 고광헌·김영훈·남윤인순·박우정)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8일 아침 7시, 장지는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다.

■ [리영희 선생 영전에…]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경향신문 2010.12.5]

리영희 선생님,

초겨울의 우중충한 아침에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으셔서 오래 가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고 보니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이렇게 낙엽지고 스산한 겨울에 무엇이 그리 바빠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선생님은 고은 시인의 말처럼 ‘어둠의 시간, 아픔의 시간’에 계셨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의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던 저희 세대 한국 청년들의 영원한 스승이셨습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사표였으며, 만년필 한 자루로 권력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기자이셨으며, 반공이라는 우상에 맞서 이성과 진실의 힘을 몸으로 보여준 비판적 지식인이셨습니다. 친일·친미·독재·부패·특권·반인도주의·성장지상주의와 안보지상주의 진영에 박정희가 있었다면, 민족·통일·민주·평화·인권의 진영에 선생님이 계셨고, 그 기울어진 저울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선생님이 버텨왔습니다. 저 캄캄한 유신독재의 어둠 속에서 그것과 감히 맞서 싸울 이유를 제공해 주었던 분이셨으며,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청년들의 희망이었고,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이었습니다. 군사독재라는 야만은 자유인·상식인으로 살고자 하는 선생님을 투사로 만들었고, 전쟁과 분단의 서슬은 평화와 인간의 격조를 지키고자 했던 선생님을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았습니다.

어두운 시절에 어둠을 대면하지 않으려 했던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뜻과 글을 애써 모른 채 하였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후배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실존이 갖는 의미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양대에 가신 후 중국 연구를 처음으로 제창하셨지만, 학계는 선생님이 중국·미국·일본, 분단문제 등 특정 학문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배척했고, 이산의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도 북진통일의 신화에 사로잡힌 이북 고향의 친구들은 그것이 통일의 길이라 생각하면서 선생님을 멀리했습니다.

허구와 냉전의 우상, 독재를 향해서는 그렇게 매섭고 엄한 채찍을 휘둘렀지만, 선생님은 원래 자유인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분노도 차가운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자유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파시즘을 자유라고 강변하는 이 거짓 자유주의에 맞서서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동료 기자들이 고관대작들과 술 마실 때, 선생님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책을 읽으셨으며, 여러 언어를 학습하셨고, 그칠 줄 모르는 탐구열과 끝까지 사실을 밝히고자 했던 언론인으로서의 근성은 부지기수의 특종기사를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후배 제자들의 주장도 언제나 경청하셨으며, 남을 비판은 하되 결코 냉소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좋은 일과 음식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습니다. 제가 신간을 보내주면 언제나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지에 날인을 해서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격려와 관심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라는 채제공이 성호 이익 선생의 쓸쓸한 묘지를 둘러보고서 쓴 시를 오늘 선생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자 정국은 오직 대북 적대의 한목소리만이 살아남고, 황해에 미 조지 워싱턴호가 뜨자 곧바로 한·미 FTA가 밀실에서 일사천리로 타결되어 버리는 이 한반도 상공의 냉전 찬바람을 여전히 맞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만나 남북화해와 자주외교의 길에 대해 시원한 충고를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인류의 모든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개선 열정과 고통당하는 이들의 처지에 대한 뜨거운 공감을 가지셨던 선생님과 함께했던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저 상식과 이성이 판치는 세상에서 편안히 쉬소서. 2010년 12월5일

후학 김동춘 삼가 씀

■ [추모시]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 고은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


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
배 터지게
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
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
슬픕니다
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지금 만인의 입 하나하나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캄캄한 슬픔으로 울먹이는데
마음 한쪽 가다듬어
이 따위 넋두리 쓸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만인이 선생님이라 선생이라 고개 숙이는데
당신께 형이라 부르는 사사로운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이제 막 이 이승의 끝과
저승의 처음이 있어야겠기에
황진 몰려오는 날
돌아봅니다
당신의 단호한 각성의 영상
당신의 치열한 형상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
그 지식이 행여
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
윗니 아랫니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앞으로 외쳐댄 사람
그런 어느날 밤
지구 저쪽에서
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
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
아니
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
아시아의 아픔
조국의 아픔
조국에 앞서
사회의 아픔
아니
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
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
껄껄 웃다가
그 웃음 틈서리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
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 [추모시] 아, 리영희 선생 / 백기완

아, 리영희 선생

백기완

리영희가 도대체 누구인데
그의 죽음을 두고 그리 시끄러운 거요
이름도 처음 듣는다는 이의 말에
시끄러운 게 아니지요 또다시
목숨을 걸고 한마디 하시는 거지요
그러구선 나는 먼 날을 더듬었다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났는가
선생이 내 병문안을 왔다가
백선생, 나 대포집이요, 나오시오
그때 일어서지도 못하고 죽도 못 삭이는
날 불러내던 그분은 뉘시던가

한살매 목숨을 걸고 불러내던 분이다
분단이 쇠벽이 될 땐 겨레 넋을 불러대고
온몸을 묶을 땐 자유혼을 불러대고
되는 마을엔 새벽을 여는 이가 있듯이
내리친 어두움은 우주가 아니라고 외치고
날강도의 거짓부리기는 우상이라 외치고
할 말을 버린 붓끝은 곧 반역이라던
선생은 이참 침묵을 거둔 것이다

가슴을 열어 보란 말이다
선생의 피울음이 들려오질 않는가
노동자, 노동운동을 사그리 죽이는 건
신자유주의의 우상화 곧 파쇼다
남북대결은 미국 전쟁 놀음의 대행이요
부자천국 만들기는 영구분단 꿍셈(음모)
서해5도 요새화는 또 다른 분단이거늘
그래도 딴 수작하는 건 통일 학살이라는
선생의 피맺힌 외침 아니 들리는가

그렇다 리영희 선생은 누구냐고 물으면
역사는 대답하리라 죽으나 사나
선생은 할 말은 반드시 하시는 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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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박선애 (1927-2010.9.25)

20080826 경기도 파주. 박선애·순애 자매.


              어머니와 엄마의 꿈 ⓒ진보미디어 청춘

신념과 바꾼 고난의 80년… ‘이념 없는 나라’로 떠나다 [경향신문 2010.9.27]

ㆍ비전향 장기수 박선애씨 별세

“북에 있는 남편이 부인의 무덤에 술 한 잔이라도 건넬 수 있게 남북 정부가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고독하고 신산(辛酸)한 삶이었다. 여든 넷에 맞은 죽음 역시 그랬다. 비전향 장기수 박선애씨는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지난 25일 눈을 감았다. 박씨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윤희보씨(93)의 부인이다.
장례위원회는 남편 윤씨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북한주민초청신청서를 26일 통일부에 제출했다. 남편이 아내의 혼이라도 위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통일부는 “곧 정부 입장을 장례위 측에 통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씨와 윤씨는 빨치산 출신이다. 박씨는 1951년 1월 포로수용소에 끌려간 것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쳐 약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윤씨와 결혼한 것은 68년. 그러나 신혼의 애틋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75년 사회안전법이 시행되면서 전향서를 쓰지 않은 두 사람은 재수감됐다. 비전향 장기수
부부가 된 것이다. 마흔 넘어 외동딸 고희선씨(43)를 얻었지만 아이를 제 품에서 키우진 못했다. 희선씨는 역시 빨치산 출신인 이모 박순애씨 아래서 컸다. 윤씨가 아닌 고씨가 된 것은 이모부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고인은 생전에 빨치산 생활을 구술하면서 “딸 혼자만 내려놨으니 얼마나 울었겠느냐. 내가
가슴 아픈 것은 말로 할 수 없다”고 술회했다. 부부는 나란히 재수감됐다가 아내가 79년, 남편이 89년 각각 출소했다. 떨어져 지낸 세월,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단 두 번이었다.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가 북송될 때 고인은 남쪽에 남기로 했다. 동생과 딸 때문이었다. 딸 고희선씨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마음은 늘 감추지 못했다”고 전했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박씨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빨치산 내에선 과감히 성차별에 맞섰다. 두번째 출소한 뒤엔 범민련 서울시연합 부의장·고문, 전국여성연대 고문 등을 지냈다. 박씨는 최근 몇 년간 병환에 시달리다 지난달 말부터 경기 고양시의 동국대
일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해 말엔 몸이 불편한 박선애·순애씨 자매를 돕기 위해 지인들이 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동국대 일산병원에 마련된 빈소는 딸 고희선씨가 지키고 있다. 순애씨는 거동이 불편한 탓에 빈소에 나오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장례위원회는 28일 오전 7시30분 병원에서
영결식을, 9시 임진각에서 노제를 치를 예정이다. 고인의 시신은 화장돼 파주 보광사 납골당에 안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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