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보 (1943.6.28~2014.10.8)




 언론자유 위해 싸운 삶 50년...끝까지 언론인이었다 [한겨레 2014.10.8]



성유보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 별세

유신정권 맞서 동아투위 결성
전두환정권 땐 민주화운동 이끌어
최근까지도 언론자유 위해 활동

성유보(사진)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이 8일 오후 5시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심장마비)으로 별세했다. 평소 심장이 약했던 고인은 지난 4일부터 췌장암으로 인한 황달 치료를 위해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향년 71.

1943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한겨레에서 창간 및 3대 편집위원장, 논설위원 등으로 활약했으며, 방송위원회 상임이사와 방송평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 등으로 일하면서 민주화의 염원을 놓은 적이 없다. 2013년 희망래일 이사장에 이어 201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도 맡아 남북통일과 평화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해왔다.

고인은 68년 <동아일보> 기자가 되면서 50년 가까이 언론인의 한길을 걸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72년 유신체제를 구축한 뒤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는 74년 10월 동아일보의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를 문제삼아 송건호 당시 편집국장 등을 연행했고,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아나운서 등이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놨다. 유신정권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광고 탄압’에 나섰고, 독자들은 익명의 광고 후원으로 이들을 응원했다. 이는 이듬해 기자 대량 해직 사태로 이어지고, 해직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고인은 이 모든 과정에 앞장섰으며, 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뒤에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1986년)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고인은 88년 한겨레 창간 작업에 참여하면서 언론인으로 ‘복귀’했다. 91년 한겨레를 떠난 뒤에도 언론인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92년 <사회평론> 재창간위원장과 이듬해 사회평론사 대표를 맡았고, 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와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을 지냈다. 2000년대 들어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내며 방송 개혁을 이끌었다.

영원한 현역 언론인으로 남고자 한 고인의 열망은 올해에도 이어졌다. 지난 1월부터 한겨레의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를 통해 70~80년대의 어두운 시대를 증언하고 그 교훈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고인은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이라는 부제의 연재물 마지막회(<한겨레> 6월24일치 31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보살이란 뜻이란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또한 그 시대 언론인이었다. 그러므로 한 시대 ‘언론의 자유’는 당대 백성들의 시대적 소망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요즈음 확실히 깨닫고 있다.”

한평생 자유언론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지켜온 칠순의 언론인은 2014년 오늘에도 언론의 자유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토로하면서 이렇게 글은 맺었다. “한국의 21세기 시민사회가 언론자유 쟁취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와 복지와 평화로의 새로운 대행진을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의 문명중심지’로 재탄생할 것이다. 한민족의 새로운 역동성에 희망을 건다.”

언론시민단체들은 9일 낮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발인 일정 등을 정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연희씨와 아들 덕무, 영무씨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