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1929.12.2-2010.12.5)


■ ‘실천 지성’ 큰별 지다 [한겨레 2010.12.5]
리영희 선생 별세…민주사회장 8일 영결식

우리 시대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 리영희 선생이 5일 별세했다. 향년 81.
<한겨레> 논설고문과 한양대 교수를 지낸 리 선생은 이날 0시40분께 입원중이던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지병인 간경변으로 눈을 감았다.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 해직당하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된 고인의 평생은 ‘반지성과 반민주에 맞선 역정’이었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69년 베트남전쟁 파병에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하다 6년째 근무하던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한 71년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76년과 80년에는 각각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압력으로 한양대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으며, 방북 취재를 기획한 89년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160일간 복역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고인의 무기는 ‘관념’이 아닌 ‘사실’이었고, ‘이론’이 아닌 ‘실천’이었다.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우상과 이성>(1977)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

유족으로 부인과 2남1녀가 있다. 빈소(02-2227-7550)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민주사회장(장례위원장 고은·백낙청·임재경, 집행위원장 고광헌·김영훈·남윤인순·박우정)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8일 아침 7시, 장지는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다.

■ [리영희 선생 영전에…]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경향신문 2010.12.5]

리영희 선생님,

초겨울의 우중충한 아침에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으셔서 오래 가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고 보니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이렇게 낙엽지고 스산한 겨울에 무엇이 그리 바빠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선생님은 고은 시인의 말처럼 ‘어둠의 시간, 아픔의 시간’에 계셨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의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던 저희 세대 한국 청년들의 영원한 스승이셨습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사표였으며, 만년필 한 자루로 권력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기자이셨으며, 반공이라는 우상에 맞서 이성과 진실의 힘을 몸으로 보여준 비판적 지식인이셨습니다. 친일·친미·독재·부패·특권·반인도주의·성장지상주의와 안보지상주의 진영에 박정희가 있었다면, 민족·통일·민주·평화·인권의 진영에 선생님이 계셨고, 그 기울어진 저울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선생님이 버텨왔습니다. 저 캄캄한 유신독재의 어둠 속에서 그것과 감히 맞서 싸울 이유를 제공해 주었던 분이셨으며,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청년들의 희망이었고,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이었습니다. 군사독재라는 야만은 자유인·상식인으로 살고자 하는 선생님을 투사로 만들었고, 전쟁과 분단의 서슬은 평화와 인간의 격조를 지키고자 했던 선생님을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았습니다.

어두운 시절에 어둠을 대면하지 않으려 했던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뜻과 글을 애써 모른 채 하였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후배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실존이 갖는 의미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양대에 가신 후 중국 연구를 처음으로 제창하셨지만, 학계는 선생님이 중국·미국·일본, 분단문제 등 특정 학문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배척했고, 이산의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도 북진통일의 신화에 사로잡힌 이북 고향의 친구들은 그것이 통일의 길이라 생각하면서 선생님을 멀리했습니다.

허구와 냉전의 우상, 독재를 향해서는 그렇게 매섭고 엄한 채찍을 휘둘렀지만, 선생님은 원래 자유인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분노도 차가운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자유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파시즘을 자유라고 강변하는 이 거짓 자유주의에 맞서서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동료 기자들이 고관대작들과 술 마실 때, 선생님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책을 읽으셨으며, 여러 언어를 학습하셨고, 그칠 줄 모르는 탐구열과 끝까지 사실을 밝히고자 했던 언론인으로서의 근성은 부지기수의 특종기사를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후배 제자들의 주장도 언제나 경청하셨으며, 남을 비판은 하되 결코 냉소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좋은 일과 음식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습니다. 제가 신간을 보내주면 언제나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지에 날인을 해서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격려와 관심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라는 채제공이 성호 이익 선생의 쓸쓸한 묘지를 둘러보고서 쓴 시를 오늘 선생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자 정국은 오직 대북 적대의 한목소리만이 살아남고, 황해에 미 조지 워싱턴호가 뜨자 곧바로 한·미 FTA가 밀실에서 일사천리로 타결되어 버리는 이 한반도 상공의 냉전 찬바람을 여전히 맞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만나 남북화해와 자주외교의 길에 대해 시원한 충고를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인류의 모든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개선 열정과 고통당하는 이들의 처지에 대한 뜨거운 공감을 가지셨던 선생님과 함께했던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저 상식과 이성이 판치는 세상에서 편안히 쉬소서. 2010년 12월5일

후학 김동춘 삼가 씀

■ [추모시]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 고은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리영희 선생 별세에 부쳐


우리한테 기쁨이나 즐거움 하도 많았는데
배 터지게
참 많이 웃기도 웃어댔는데
그것들 다 어디 가버렸습니까
슬픕니다
가슴팍에 돌팔매 맞았습니다

리영희 선생!

지금 만인의 입 하나하나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캄캄한 슬픔으로 울먹이는데
마음 한쪽 가다듬어
이 따위 넋두리 쓸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그렇습니다
만인이 선생님이라 선생이라 고개 숙이는데
당신께 형이라 부르는 사사로운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이제 막 이 이승의 끝과
저승의 처음이 있어야겠기에
황진 몰려오는 날
돌아봅니다
당신의 단호한 각성의 영상
당신의 치열한 형상

그리도
지는 해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지식이란 지식 다 찾아가건만
그 지식이 행여
삶의 골짝과 동떨어진 것
윗니 아랫니
못 견디는 사람
그리도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허나 옥방에서
프랑스어판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밀가루떡 몇 개 괴어 놓고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
그럴수록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시대가
그 진실을 모독하는 허위일 때
또 시대가
그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일 때
그 장벽 기어이 무너뜨릴 진실을
맨앞으로 외쳐댄 사람
그런 어느날 밤
지구 저쪽에서
사상의 은사가 있다 한
그 은사로 젊은이들의 진실을 껴안은 사람
아니
고생만 시킨 마누라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설거지 못한다고 꾸중 들은 사람
아시아의 아픔
조국의 아픔
조국에 앞서
사회의 아픔
아니
세계 인텔리의 아픔으로
등불을 삼았던 사람

대전 유성병원 침대에서
껄껄 웃다가
그 웃음 틈서리로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번은 내줄 수밖에 없겠어
하고 슬며시 내보이던 사람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벅찰 역사 차라리 풍류일러라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 [추모시] 아, 리영희 선생 / 백기완

아, 리영희 선생

백기완

리영희가 도대체 누구인데
그의 죽음을 두고 그리 시끄러운 거요
이름도 처음 듣는다는 이의 말에
시끄러운 게 아니지요 또다시
목숨을 걸고 한마디 하시는 거지요
그러구선 나는 먼 날을 더듬었다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났는가
선생이 내 병문안을 왔다가
백선생, 나 대포집이요, 나오시오
그때 일어서지도 못하고 죽도 못 삭이는
날 불러내던 그분은 뉘시던가

한살매 목숨을 걸고 불러내던 분이다
분단이 쇠벽이 될 땐 겨레 넋을 불러대고
온몸을 묶을 땐 자유혼을 불러대고
되는 마을엔 새벽을 여는 이가 있듯이
내리친 어두움은 우주가 아니라고 외치고
날강도의 거짓부리기는 우상이라 외치고
할 말을 버린 붓끝은 곧 반역이라던
선생은 이참 침묵을 거둔 것이다

가슴을 열어 보란 말이다
선생의 피울음이 들려오질 않는가
노동자, 노동운동을 사그리 죽이는 건
신자유주의의 우상화 곧 파쇼다
남북대결은 미국 전쟁 놀음의 대행이요
부자천국 만들기는 영구분단 꿍셈(음모)
서해5도 요새화는 또 다른 분단이거늘
그래도 딴 수작하는 건 통일 학살이라는
선생의 피맺힌 외침 아니 들리는가

그렇다 리영희 선생은 누구냐고 물으면
역사는 대답하리라 죽으나 사나
선생은 할 말은 반드시 하시는 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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