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박선애 (1927-2010.9.25)

20080826 경기도 파주. 박선애·순애 자매.


              어머니와 엄마의 꿈 ⓒ진보미디어 청춘

신념과 바꾼 고난의 80년… ‘이념 없는 나라’로 떠나다 [경향신문 2010.9.27]

ㆍ비전향 장기수 박선애씨 별세

“북에 있는 남편이 부인의 무덤에 술 한 잔이라도 건넬 수 있게 남북 정부가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고독하고 신산(辛酸)한 삶이었다. 여든 넷에 맞은 죽음 역시 그랬다. 비전향 장기수 박선애씨는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지난 25일 눈을 감았다. 박씨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윤희보씨(93)의 부인이다.
장례위원회는 남편 윤씨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북한주민초청신청서를 26일 통일부에 제출했다. 남편이 아내의 혼이라도 위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통일부는 “곧 정부 입장을 장례위 측에 통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씨와 윤씨는 빨치산 출신이다. 박씨는 1951년 1월 포로수용소에 끌려간 것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쳐 약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윤씨와 결혼한 것은 68년. 그러나 신혼의 애틋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75년 사회안전법이 시행되면서 전향서를 쓰지 않은 두 사람은 재수감됐다. 비전향 장기수
부부가 된 것이다. 마흔 넘어 외동딸 고희선씨(43)를 얻었지만 아이를 제 품에서 키우진 못했다. 희선씨는 역시 빨치산 출신인 이모 박순애씨 아래서 컸다. 윤씨가 아닌 고씨가 된 것은 이모부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고인은 생전에 빨치산 생활을 구술하면서 “딸 혼자만 내려놨으니 얼마나 울었겠느냐. 내가
가슴 아픈 것은 말로 할 수 없다”고 술회했다. 부부는 나란히 재수감됐다가 아내가 79년, 남편이 89년 각각 출소했다. 떨어져 지낸 세월,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단 두 번이었다.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가 북송될 때 고인은 남쪽에 남기로 했다. 동생과 딸 때문이었다. 딸 고희선씨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마음은 늘 감추지 못했다”고 전했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박씨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빨치산 내에선 과감히 성차별에 맞섰다. 두번째 출소한 뒤엔 범민련 서울시연합 부의장·고문, 전국여성연대 고문 등을 지냈다. 박씨는 최근 몇 년간 병환에 시달리다 지난달 말부터 경기 고양시의 동국대
일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해 말엔 몸이 불편한 박선애·순애씨 자매를 돕기 위해 지인들이 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동국대 일산병원에 마련된 빈소는 딸 고희선씨가 지키고 있다. 순애씨는 거동이 불편한 탓에 빈소에 나오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장례위원회는 28일 오전 7시30분 병원에서
영결식을, 9시 임진각에서 노제를 치를 예정이다. 고인의 시신은 화장돼 파주 보광사 납골당에 안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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