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길 (1919.9.1-2011.9.25)


봄길 박용길 여사 영전의 감회


                                                고은

기어이 가시는구려
봄길이시여
봄길이시여
늦봄 문익환의 길
봄길 박용길이시여

굳이 슬픔도 소용없습니다
돌아보니
어이 그리도 하나이셨는지요
이른 봄 늦은 봄이 여름으로 가고
가을로 가고
겨울로 오고
또 봄으로 오는길
내 나라 산천 철철의 길
그 길 밖에 또 어느 길이셨는지요

어이 그리도 둘이셨는지요
누가 누구의 것 아니고
누가 누구의 하나로 사그라지는 것 아닌
서로 높여
서로 높고
서로 낮춰
서로 낮고
정녕 끝간데 모를 둘로 엄연하셨지요

사랑일진대
이러하올세라
아니 아픈동지일진대
비바람 속
그러하올세라
문익환이 곧 박용길
박용길이 곧 문익환
그러하고 그러하올세라

지난 날
가시버시 5년만 살다
누가 마저 죽어도 좋다시던
그 젊은 날의 간절한 사랑으로
이 세상 모질고 눈부신 날들을
이토록 잘도 살아내셨지요.
과연 몇십년을
몇백년으로 살아내셨지요
오늘 한동안 소리 하나 없는 대낮에
무슨 미완이 남았으리오

봄길이시여
당신은 늘 사사롭지 않으셨지요
골방의 나 하나도
틀림없이 남남 속의 그것이셨지요
한밤중 잠결에도
무심코 여럿의 마음이셨지요
당신의 지극정성 궁체글씨
한 자
한 자 새겨나가는
내 겨레의 넋들이
꿈틀꿈틀 살아나셨지요

속옷 한 벌 새 것 없는 삶에도
마음은 늘
금방 돋아난
아침 이슬의 새 잎사귀셨지요

늦봄하고
봄길하고 나서는 길
문익환하고
박용길하고 나서는 길
아무리 꼭 막아서도
거기 반드시 문 열리는 꽃
활짝 피어났지요

봄길하고
늦봄하고
마주 앉아 밥 먹는 방
아무리 고단한 하루일지나
여기 싱싱한 새 각시같은
새 서방같은 향내
문밖으로 번져났지요

이제 가시는구려
가서
함께 누워
흙이 되고
하늘이 되는 거기 가시는구려

웬일인지 슬픔도 필요없습니다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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