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John Berger (1926.11.5-2017.1.2)



◼︎ John Berger, art critic and author, dies aged 90 [The Guardian 2017.1.2]


◼︎ John Berger, art critic and author of Ways of Seeing, dies [BBC 20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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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 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8.13-2016.11.25)





◼︎ Fidel Castro, Cuba’s revolutionary leader, dies aged 90 [The Guardian 201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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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숙 (1960.8.29~2016.3.21)


20101208 국회 본회의장


◼︎ 장애여성인권운동가 곽정숙 전 의원 별세


◼︎ "일 년 남았대" 어느 전직 국회의원의 고백

 [곽정숙 전 의원 인터뷰①] 삶과 죽음 사이... 여성장애인 리더에서 정치인으로


◼︎ 비례대표 1번 제안, 한마디로 거절했다

[곽정숙 전 의원 인터뷰②] 장애여성인권운동가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 "근데 나 오래 살 것 같아"곽정숙이 환하게 웃었다

 [곽정숙 전 의원 인터뷰③] 말기암과 싸우는 그가 남긴 유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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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1941~2016.1.15)


20060921


◼︎ "우리 모두의 '마음의 스승', '시대의 스승'이 떠나셨다" [한겨레 2016.1.16]


◼︎ 신영복의 일생을 사색한다 [프레시안 2016.1.16]


◼︎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 [한겨레 20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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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1942-2015.7.31)






◼︎ '한국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 김수행 교수 별세 [한겨레 2015.8.2]



◼︎ [김종철의 수하한화]김수행, 아름다운 영혼을 기리며 [경향신문 20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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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Gunter Wilhelm Grass (1927.10.16-2015.4.13)


Günter Grass – Biography-Portrait by Ralph Ueltzhoeffer (2012).


 ■ 나치 잔재·이스라엘 핵 비판…할 말 했던 ‘양철북’ 작가 잠들다 [한겨레 2015.4.13]


노벨문학상 귄터 그라스 별세


소설 <양철북>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13일 숨을 거두었다.

소설 <양철북>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13일 숨을 거두었다. 향년 88.


1927년 발트해 연안 항구도시 단치히(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난 그라스는 2차대전 당시 독일군 탱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미군 포로로 1946년까지 잡혀 있던 경험을 소설로 쓴 1959년작 <양철북>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그에게 1999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후 독일 최고 작가로 꼽히지만

뒤늦게 나치 친위대 복무 밝힌뒤

격렬한 논쟁 불러


한국과도 깊은 인연

유신때 DJ·김지하 시인 석방운동

‘한겨레’ 가 주최한 대담에선

“대북지원만이 분단상황 완화”


전후 독일 문학의 최고 작가로 평가받는 그라스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으며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나라 안팎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1990년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심포지엄의 기조연설을 통해 자신이 비판한 것은 “통일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통일을 추구하는가’ 하는 과정과 방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부유한 서독이 가난한 동독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서독인들에게는 동독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겨레> 주최로 김누리 중앙대 교수와 한 대담에서도 그는 “분단의 부담은 대부분 독일의 경우에는 동독 사람들이, 한국에선 북한 사람들이 짊어져야 했다”며 “(한반도의 경우) 남한의 일방적인 대북 지원만이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라스는 1970년대 수감돼 있던 김대중 대통령과 김지하 시인 등의 석방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198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 기조연설에서도 당시 일시적으로 연행되어 있던 소설가 황석영의 처지를 거론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작가였다.


서독 시절 사회민주당 지지자이자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연설문 집필자로서 직접적인 정치적 참여를 마다하지 않은 그는 독일 안팎에서 숱한 논쟁에 얽히기도 했다. 2006년에는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에서 나치의 엘리트 조직인 ‘무장 친위대’ 복무 경력을 밝혀 격렬한 논란을 낳았다. 그가 비록 범죄행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독일 사회의 도덕 교사이자 양심’으로 취급받던 그가 그토록 중요한 사실을 왜 뒤늦게 고백했는가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2012년에는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비판하는 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전범국 독일에서는 금기와도 같았던 ‘반유대주의’를 토론의 장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는 이 시에서 “핵무장 이스라엘이 가뜩이나 불안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며 “이런 사실에 모두가 침묵하는 것은 / (…) / 반유대주의라는 보편화한 판결” 때문이라고 썼다.


그라스는 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삶에 거대하고 결정적인 힘을 행사하는 정치에 대해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 문학은 변화를 가져올 힘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지닌 작가였다.


 나치 잔재·이스라엘 핵 비판…할 말 했던 ‘양철북’ 작가 잠들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686723.html

 ‘정곡 찔린’ 이스라엘 귄터 그라스 입국금지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527531.html

 “나는 나치 친위대였다” 파격 고백 귄터 그라스 자서전 불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50798.html

 귄터 그라스, 송두율교수 석방 촉구편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8&aid=0000041867

 [유레카] 동네북과 양철북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767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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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 (1943.6.28~2014.10.8)




 언론자유 위해 싸운 삶 50년...끝까지 언론인이었다 [한겨레 2014.10.8]



성유보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 별세

유신정권 맞서 동아투위 결성
전두환정권 땐 민주화운동 이끌어
최근까지도 언론자유 위해 활동

성유보(사진) <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이 8일 오후 5시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심장마비)으로 별세했다. 평소 심장이 약했던 고인은 지난 4일부터 췌장암으로 인한 황달 치료를 위해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향년 71.

1943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한겨레에서 창간 및 3대 편집위원장, 논설위원 등으로 활약했으며, 방송위원회 상임이사와 방송평가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 등으로 일하면서 민주화의 염원을 놓은 적이 없다. 2013년 희망래일 이사장에 이어 201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도 맡아 남북통일과 평화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해왔다.

고인은 68년 <동아일보> 기자가 되면서 50년 가까이 언론인의 한길을 걸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72년 유신체제를 구축한 뒤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는 74년 10월 동아일보의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를 문제삼아 송건호 당시 편집국장 등을 연행했고,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아나운서 등이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놨다. 유신정권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광고 탄압’에 나섰고, 독자들은 익명의 광고 후원으로 이들을 응원했다. 이는 이듬해 기자 대량 해직 사태로 이어지고, 해직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고인은 이 모든 과정에 앞장섰으며, 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뒤에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1986년)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고인은 88년 한겨레 창간 작업에 참여하면서 언론인으로 ‘복귀’했다. 91년 한겨레를 떠난 뒤에도 언론인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92년 <사회평론> 재창간위원장과 이듬해 사회평론사 대표를 맡았고, 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와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을 지냈다. 2000년대 들어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내며 방송 개혁을 이끌었다.

영원한 현역 언론인으로 남고자 한 고인의 열망은 올해에도 이어졌다. 지난 1월부터 한겨레의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를 통해 70~80년대의 어두운 시대를 증언하고 그 교훈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고인은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이라는 부제의 연재물 마지막회(<한겨레> 6월24일치 31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보살이란 뜻이란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또한 그 시대 언론인이었다. 그러므로 한 시대 ‘언론의 자유’는 당대 백성들의 시대적 소망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요즈음 확실히 깨닫고 있다.”

한평생 자유언론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지켜온 칠순의 언론인은 2014년 오늘에도 언론의 자유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토로하면서 이렇게 글은 맺었다. “한국의 21세기 시민사회가 언론자유 쟁취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와 복지와 평화로의 새로운 대행진을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의 문명중심지’로 재탄생할 것이다. 한민족의 새로운 역동성에 희망을 건다.”

언론시민단체들은 9일 낮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발인 일정 등을 정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연희씨와 아들 덕무, 영무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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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 파기는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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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횃불,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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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슬픔과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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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살다』 북콘서트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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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람의 일인가 (「삶이 보이는 창」 92호)

이게 사람의 일인가




1.

3월 3일 오전 한 방화범이 지저분하다며 대한문 분향소 농성천막에 불을 질렀다. 다음날 찾아간 화재현장 잿더미 속에서 타다 만 이 엽서를 발견했다. 작년 5월 24일 대한문 분향소가 철거되고 다시 천막을 설치하려다가 몸싸움이 일어난 뒤 누군가 짓밟힌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 사진이 엽서가 됐고 불에 탄 엽서를 다시 사진에 담았다.




2.

불에 탄 쓰레기들을 실어가기 위해 중구청 청소차가 왔다. 그 빈자리에 다시 천막을 치지 못하게 하려고 중구청 철거반원들이 대형 화분들을 설치하려고 해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청소차 점멸등이 분노한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의 얼굴을 비춘다.




3.

하나 남은 분향소 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만들기 위해 중구청이 트럭에 싣고 온 흙을 쏟아 부었다. 24명의 죽음을 추모하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이것을 보고 무엇을 느꼈겠는가. 무덤이었다. 이게 사람의 일인가 싶다. 모르겠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그들의 머릿속을. 이런 나라라면 매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다.




4.

아수라장을 백기완 선생님이 보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화단 끝에 주저앉아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 유명자의 뒷덜미를 잡아채던 경찰이나 평탄화 작업하면서 일부러 사람들한테 흙을 뿌려대던 중구청 직원인지 용역인지가 하는 짓거리에 분노하는 수밖에.




5.

이렇게 만들기 위해 사람들 마음에 대못을 박았나. 이곳의 꽃과 나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 여기가 어디라구. 중구청에 맞서 싸우며 “여기가 어디라구!”라고 외쳤다던 한 노동자의 벌개진 눈을 어떻게 위로할 건가.




6.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작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그래서 버틸 수 있는 것이구나. 그들이 겪는 슬픔과 아픔이 모두 더해졌더라면 어땠을까. 정말 신의 섭리라면 신께 고마워할 일이다. 




7.

다시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철거 전 우리는 매주 농성장을 가꾸기 위해 모였다. 한진 노동자들의 작업화에 꽃을 심은 것처럼. 돌이켜보니 그런 것이 작은 일이 아니었다.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연대’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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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포클레인 밑의 평화 (<말과활> 창간호)

밀양, 포클레인 밑의 평화

 

1. 

불안하다. 자기 일이 아닌 일에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거리의 사진가한텐 내 일이 아님에도 불안을 느낄 일이 많다. 대추리에서 기륭에서 한진중공업에서 쌍용에서 그랬다. 밀양도 마찬가지다. 가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식 조금만으로도 불안을 느낀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전개될지 깊숙하게는 몰라도 대강은 알 수 있기 때문인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전의 경험으로 알게 해 줬다.


그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지난 5월 23일, 24일 밀양을 찾아갔다. 한국전력은 5월 20일부터 신고리 원전에서 경남 창녕의 북경남 변전소를 잇는 765kV 송전선로 건설공사를 다시 시작한 상태였고 밀양시 부북면, 상동면, 산외면, 단장면 네 지역을 지나는 52개(81번~132번) 송전철탑은 주민들이 8년째 막아내고 있었다. 공사가 시작된 20일 당일부터 언론에는 경찰과 한전 직원인지 용역인지 모를 사람들에 맞서 웃옷을 벗고 밧줄로 목을 매며 처절하게 싸우다 병원으로 실려가는 할매, 할배들의 모습이 실렸다. 이후 약 열흘 동안 이런 충돌이 이어지다가 결국 2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에너지소위의 중재로 밀양 765㎸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와 한국전력 및 산업통상자원부가 '밀양 송전탑 건설 관련 전문가협의체 구성 중재안'에 합의하면서 40일 동안 공사는 멈췄다.

 



23일엔 오후에 도착해 그날 공사가 끝난 뒤라 경찰과 한전 직원들이 빠진 공사현장만 둘러봤다. 단장면의 바드리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89번 송전탑 현장이 있고 닦이지 않아 울퉁불퉁한 임도를 차로 15분 정도 더 올라가면 길이 끝난 곳에서 양쪽으로 84번, 85번 현장이 나온다. 양쪽 모두 길 중간에 멈춰 세워진 포클레인으로 막혀 있다. 아마도 내일 저 포클레인 밑에서 할매, 할배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으리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보는 것만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던 많은 정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더불어 내일 공사가 시작되면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도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게 두려운 일이다.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사진으로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는 것이 두렵다. 차라리 어떻게 싸울지 고민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가도 역할이 따로 있는 거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넘어가기 마련이다. 언제나 그렇듯.


포클레인을 지나면 철탑이 세워질 공사현장이 나온다. 산 능선 양쪽 비탈의 나무가 대부분 베어져 있고 비탈진 경계에는 자루에 흙을 담아 쌓아 놨다. 아마도 철탑의 다리가 놓일 자리에는 어른 예닐곱 명이 감싸 안을만한 크기의 거푸집이 세워져 있다. 다리 하나가 이 정도면 철탑의 크기는 정말 어마어마할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문기주 정비지회장, 한상균 전 지부장,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이 171일 동안 올랐던 평택의 철탑은 154kV 송전탑이었다. 그 철탑도 아찔하게 높아보였는데 여기 세워질 철탑은 154kV 송전탑보다 열여덟 배나 많은 전류를 보내며 높이는 140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직접 보지 않으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얼마 전 충남 당진을 지나가다가 흔히 보던 송전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송전탑들이 이어진 모습에 차를 멈추고 봤던 기억이 났는데, 다음날 한전 직원한테 물어보니 역시나 당진 지역의 송전탑이 밀양에 세우는 것과 같은 765kV 송전탑이라고 한다. 밀양의 주민들도 그래서 당진으로 견학을 갔었다고 하니 그 거대한 철탑을 실제로 본 주민들이 철탑 아래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이해가 간다.



2.

다음날 새벽 두 시 반부터 단장면 동화전 마을회관 앞에 할매, 할배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한전 직원들이 모이기 전, 세 시부터 바드리마을 공사현장을 막아야 한다고 한다. 동화전마을 할매, 할배들이 바드리마을 주민들은 한 사람도 없는 바드리마을 공사현장으로 꼭두새벽부터 올라가는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았다.


84번과 85번 현장이 갈라지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와 있던 한전 직원 몇 명이 주민들을 둘러싸고 범인 다루듯 사진을 찍어댄다. 주민들은 묵묵히 양쪽 포클레인 밑으로 들어갔다. 85번 현장 포클레인 밑으로 들어간 할매 둘은 괄괄하다. 들어가자마자 쇠사슬로 포클레인에 몸을 묶는다. 경찰이나 한전 직원이 와도 지지 않는다. 여긴 걱정이 없다. 반면 84번 현장 포클레인 밑으로 들어간 할매 둘은 얌전하다. 조용히 들어가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도 한전 직원들 인기척이 나면 바로 자는 척 눕는다. 강한 햇살이 만들어내는 거친 빛과 그림자. 그 속에 포클레인 무한궤도와 할매들의 고단한 몸과 신발이 어우러진다. 애달프다. 이 작은 몸들이 목숨을 걸고 여기 누웠다는 걸 한전 직원들은 알까.



시간이 갈수록 한전 직원들과 경찰이 많아진다. 한전 특별대책본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거친 말투로 할매들을 다그친다. 어서 나오라고. 그들 앞에서 할매들은 외부세력에 휘둘리는 바보 멍청이가 됐고,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공동대표 김준한 신부와 이계삼 사무국장은 불순한 외부세력이 됐다. 85번 현장과 달리 몸을 묶지 않고 있던 84번 현장 할매들의 쇠사슬을 공사감독이라는 사람이 낚아채 갔다. 그제야 할매들이 밧줄로 몸을 묶는다. 이어서 서른 명 남짓한 남녀 직원들이 포클레인 앞에 와 앉는다. 물어보니 인근 한전 직원들이 교대로 나온다고 한다. 현장을 둘러보곤 혀를 찬다. ‘착한 할머니들이 이 더운 데서…….’


다 들리는데, 끌끌 혀 차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일도 못 보고 자는 척 해야만 하는 할매들한텐 이런 모욕이, 이런 폭력이 없다. 결국 84번 현장의 두 할매는 새벽 세 시에 올라와 일곱 시간을 버틴 뒤 병원으로 실려갔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던 이들이, 할매들의 안전을 걱정하던 이들이 포클레인을 둘러싸고 칼로 밧줄을 자른 뒤 흙 담는 자루에 할매를 둘둘 말아 사진도 못 찍게 상자조각으로 할매 얼굴을 가리고 데려가 버렸다.


어리둥절했다. 할매들이 더위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평범한 일반 직원들이 상관의 지시 한 마디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경찰이든 직원이든 용역이든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밀양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약간 충격이었다. 마치 빨리 끝내버리고 더위를 피해 퇴근하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3.

한나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를 집행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보고 펴낸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다.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괴물의 모습이 아니었다. 노년에 접어든 평범한 남자였다. 아주 평범하고 이성적이고 근면한 모습까지 보여준 아이히만이 악마 같은 행위를 했던 건 사고의 무능력, 곧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때문이었다. 아렌트는 “대부분의 악행은 선해지거나 악해지기로 결심한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이것은 슬픈 진실이다”라고 말한다. 밀양 산 속에서 만난 평범한 한전 직원들 덕분에 ‘악의 평범성’, ‘생각 없음’ 두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주민들 처지에 대한 생각 없이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만족을 즐기는 삶에 대한 경고다.


밀양에 오기 전에 느낀 불안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두 말이 밖으로 드러나는 장면과 마주칠까봐 불안했다. 공권력일 수도 있고 폭력일 수도 있고 강제철거나 조롱, 위선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무리를 만나는 것이 불안하다. 사람이 사람한테 해서는 안 될 일이고 슬픈 일이기 때문에. 용산의 외침, “여기 사람이 있다!”는 그래서 다시 듣고 싶지 않은 구호다.



그날이 지나고 며칠 뒤 전문가협의체가 구성돼 40일 동안 공사는 멈췄다. 농번기라 주민들에겐 숨통이 트이는 일이지만 잠깐 동안의 불안한 평화일 뿐이다. 전문가협의체 아홉 명은 대책위 쪽 셋, 한전 셋, 국회 셋으로 구성되는데 국회 몫이 여야와 여야 합의 추천 위원장 한 명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5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이계삼 사무국장은 “결론이 내려지면 따라야 합니다.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한 사람이 어느 한편에 서면 5대 4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8년의 투쟁이 5대 4에 결판난다는 게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독소조항입니다. 주민들은 모 아니면 도인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거예요!”라고 울부짖었다.


이 사무국장의 말 가운데 “당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지만 실은 아주 높은 수준의 공적인 대의를 체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일까.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6월 7일 제9회 박종철인권상을 ‘밀양 할머니·할아버지들’한테 건넸다. 시상식에 온 밀양 네 마을의 할매, 할배들은 얼마나 억울한 게 많았는지 소감을 말하려고 마이크를 잡기만 하면 하나같이 울먹였다. 상동면에서 온 할매가 울면서 외친 물음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사실 묻고 싶습니다. 우리한테 인권은 있는 것인지. 그 말을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인권이 있는 나랍니꺼?”



40일이 지난 뒤 7월에 밀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6월 10일에도 서울 대한문 쌍용차 농성장, 환구단 재능교육 농성장, 양재동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이 철거됐다. 어김없이 경찰, 구청 직원들의 폭력이 있었다. 임무에 충실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 없음에 무서운 악이 숨어 있다. 그래서 밀양 40일의 평화가 헛된 일로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또 밀려든다. 밀양에서 벌어진 폭력 뒤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면 뒤에 올 폭력은 더 큰 폭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사 말고 농사짓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격월간 <말과활>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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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차베스 Hugo Rafael Chavez Frias (1954.7.28-2013.3.5)



Postscript: Hugo Chávez, 1954-2013 [The New Yorker 2013.3.5]

 Posted by Jon Lee Anderson


Venezuelan President Hugo Chávez Frias, who died on Tuesday, from cancer, at the age of fifty-eight, was one of the most flamboyantly provocative leaders on the world scene in recent years. His death came after months in which his health was a national mystery, the subject of obfuscation and rumors; he spent inauguration day for his second term in a hospital bed in Cuba. Vice-President Nicolás Maduro, who made the announcement, is one of the politicians now maneuvering to control Venezuela, where elections will be held within thirty days.


A one-time army paratrooper who served two years in prison after leading a botched military coup against Venezuela’s government in 1992, Chávez emerged from behind bars, after an amnesty, with a renewed determination to achieve power, and sought the support of Cuba’s veteran Communist leader Fidel Castro to do so. In 1998, Chávez won Venezuela’s Presidential elections, promising to change things in his country forever, from top to bottom. Since the day he was first sworn in as President, in February, 1999, he devoted himself to doing precisely that. What he has left is a country that, in some ways, will never be the same, and which, in other ways, is the same Venezuela as ever: one of the world’s most oil-rich but socially unequal countries, with a large number of its citizens living in some of Latin America’s most violent slums.


To his credit, Chávez was devoted to trying to change the lives of the poor, who were his greatest and most fervent constituents. He began by hammering through a new constitution and renaming the country. Simon Bolívar, who had fought to unite Latin America under his rule, was Chávez’s hero, and so he changed the country’s name to the Bolivarian Republic of Venezuela, and thereafter spent a great deal of time and resources attempting to forge what he called his “Boliviarian Revolution.” It was not, initially, to be a socialist or even necessarily anti-American endeavor, but over the following years, Chávez’s rule, and his adopted international role, became both, at least in intention.


I met Chávez a number of times over the years, but the first time I saw him was in 1999, shortly after he had become Venezuela’s President, in Havana, Cuba, giving a speech in a salon at the University. Both Castro brothers were in attendance—a rare sight—as were other senior members of the Cuban Politburo. Fidel Castro looked on and listened raptly as Chávez spoke for ninety minutes, essentially laying out the rhetorical groundwork for the intense and deep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the two leaders, that was soon to follow. That day, a number of observers present in the room commented on what appeared to be a major bromance between the two. They were right. Chávez, younger than Fidel by nearly thirty years, soon became inseparable from the Cuban leader, who was clearly a father figure and a role model. (Chávez’s own family was modest and provincial, from the Venezuelan interior.) And for Castro, Chávez was an heir and something like a beloved son. Uncannily, or fittingly, it was Fidel who noticed Chávez’s discomfort on a visit to Havana in 2011, and insisted that he see a doctor—who promptly discovered Chávez’s cancer, a tumor described as the size of a baseball somewhere in his groin area. Since then, and until he returned home in February, terminally ill, Chávez received virtually all of his cancer treatment in Havana, under Fidel’s close scrutiny.


A warm and amiable showman, with a remarkable sense of occasion as well as strategic opportunity, Chávez grew in ambition, and global stature, during the Bush years, in which Latin America was relegated to a back burner for Washington. Chávez was alienated early on by the bellicose rhetoric of the Bush Administration in the post-9/11 period, and became increasingly acerbic about policies and attitudes of the American “empire.” He delightedly ridiculed the U.S. President he called “Danger Man” and “Donkey” and whom he regularly mocked on his weekly television show, “Aló Presidente,” on which he sometimes made governing seem like reality television. (He once ordered his Defense Minister to send Venezuelan forces to the Colombian border live on “Aló Presidente.”)


An attempted coup d’etat by a cabal of right-wing politicians, businessman, and military men in 2002 saw Chávez briefly and humiliatingly detained, before he was freed and allowed to resume office. The coup against Chávez had failed, but not before the plotters had apparently received a wink and a nod from the Bush Administration. Chávez never forgave the Americans. Thereafter, his anti-American rhetoric became more heated, and whenever possible he sought to discomfit Washington. Chávez closed U.S. military liaison offices in Venezuela, and ended coöperation with the 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Even earlier, in 2000, Chávez had flown to Baghdad for a friendly visit with Saddam Hussein. Later on, in his avowed ambition to weaken the U.S. imperio and create a “multipolar world,” he would go on to embrace others with similarly anti-American stances: Iran’s Ahmadinejad was one, Belarus’s Lukashenko was another. He invited Vladimir Putin to send his navy to do exercises in Venezuelan waters, and to sell him weapons. And there was his increasingly chummy, and dependent, relationship with Fidel Castro.


Venezuelan oil was flowing to energy-strapped Cuba, effectively ending the country’s almost decade-long penurious “Special Period” that followed the Soviet collapse and the abrupt end of three decades of generous subsidies from Moscow. Cuban doctors, sports instructors, and security men were soon travelling in the other direction, helping Chávez by staffing some of the programs he called Misiones, aimed at alleviating poverty and disease in Venezuela’s slums and rural hinterlands. Chávez and Castro took trips together, and frequently visited one another’s countries, and it was obvious that they loved one another’s company.


On a visit to Caracas in 2005, shortly after Chávez had announced that he had decided that socialism was the way forward for his revolution and for Venzuela, I saw him in the Presidential palace. He was manic with newfound revolutionary fervor. In a meeting with poor peasant farmers, he announced the seizure of several large private landholdings in the interior, and instructed them euphorically to organize themselves into collectives and farm the confiscated farms. “RAS!,” he shouted happily, repeating it several times. “RAS!” An aide explained that the acronym meant “Rumbo al socialismo”—“Onward to socialism.” It never really panned out, though. Chávez’s attempts at collectivization and agrarian reform seemed ill-planned and out-of-time, somehow, much as he himself often seemed a throwback to earlier times, when Latin America was dominated by willful caudillos, and there was a Cold War with a world clearly polarized.


A couple of years later, I asked him why, so late in the day, he had decided to adopt socialism. He acknowledged that he had come to it late, long after most of the world had abandoned it, but said that it had clicked for him after he had read Victor Hugo’s epic novel “Les Misérables.” That, and listening to Fidel.


Fuelled by billions of dollars from the spike in oil prices, Chávez had gained significant influence in recent years throughout the hemisphere, forming close relationships with a number of emergent leftist regimes that, in some cases, he also subsidized and helped mold, in Bolivia, Argentina, and Ecuador, and with Nicaragua, once again led by the old Sandinista leader Daniel Ortega. He also formed a trade bloc, called ALBA, aimed at countering American economic hegemony in the region. He predicted a waning of U.S. influence and a chance, after all, for a revival of Bolívar’s grand vision. In a sense, Chávez was right. U.S. influence has waned over the past decade or so in Latin America; his timing was good. But in the region, it was not Venezuela but Brazil, finally emergent from its slumber as a regional economic and political powerhouse, that began to fill that vacuum. Brazil’s last leader, Lula, who was also a left-wing populist, also made “the people” and poverty alleviation a priority of his Administration, and, with a better management team and without all the polarizing confrontation with the imperio, he succeeded to an impressive degree. In Venezuela, by contrast, Chávez’s revolution suffered from mediocre administrators, ineptitude, and a lack of follow-through.


What is left, instead, after Chávez? A gaping hole for the millions of Venezuelans and other Latin Americans, mostly poor, who viewed him as a hero and a patron, someone who “cared” for them in a way that no political leader in Latin America in recent memory ever had. For them, now, there will be a despair and an anxiety that there really will be no one else like him to come along, not with as big a heart and as radical a spirit, for the foreseeable future. And they are probably right. But it’s also Chávism that has not yet delivered. Chávez’s anointed successor, Maduro, will undoubtedly try to carry on the revolution, but the country’s untended economic and social ills are mounting, and it seems likely that, in the not so distant future, any Venezuelan despair about their leader’s loss will extend to the unfinished revolution he left behind.


At the tail end of a trip that Fidel and Chávez took together in 2006, Castro fell ill with diverticulitis and nearly died, leading him to resign from Cuba’s Presidency a year and a half later and hand over power to his younger brother Raúl. I was on Chávez’s plane when he flew to Cuba, in early 2008, to congratulate Raúl. In Havana, Chávez vanished, off to visit Fidel, who was still sick and in seclusion. On the flight back the next day, Chávez reported happily to all of us aboard his plane, “Fidel is just fine.” He added, “Fidel asked me to say hello to all of you for him!” Five years later, the Castros, both octogenarians, are alive, and it is Chávez who has passed from the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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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집권 14년의 명암 [경향신문 2013.3.6]


차베스는 집권 14년간 석유를 무기로 국내적으로 사회주의적 개혁조치를 취했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중남미 통합운동을 벌였다. 19세기 베네수엘라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범아메리카주의와 페루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대통령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자본자유화, 탈규제,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차베스의 정책들은 베네수엘라와 그 너머의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션의 나라’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미션의 나라’였다. “예수는 혁명가”라고 말한 그는 선교사의 열정으로 베네수엘라를 바꾸자고 말하곤 했다. 그가 주도한 일련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에는 ‘미시온(misssion·선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네수엘라 석유와 쿠바 의료의 맞교환에 의한 무료 의료 사업은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라 불렸다. 공교육 투자를 대폭 늘려 무상교육을 확대했다. 문맹퇴치를 위한 ‘미시온 로빈손’, 무상 고등 교육인 ‘미시온 리바스’ 등이 그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에 속한 유휴 농지를 시장가격에 사들여 경작 농민에게 제공하는 ‘미시온 사모라’도 시행했다.

‘미시온’을 위한 재원은 석유에서 나왔다. 차베스는 1958년 ‘푼토피호’ 협약이후 40년간 지속된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의 보수양당체제를 끝내고 이들이 독식하던 석유 수입을 빈민층과 중하층으로 돌렸다. 국내총생산의 1/3과 정부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영석유공사(PDVSA)가 그 중심이다. 국영석유공사(PDVSA)의 ‘폰데스빠’라는 기금이 각종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재정을 지원한다.

차베스의 ‘미시온’은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03년 62.1%에서 2007년 33.6%로 줄었고 2011년 31.9%에서 안정화되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3년 3482달러에서 2011년 1만2000달러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남미 개도국들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3470달러에서 8574달러로 상승한 것에 비하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신사회주의’의 명암

차베스의 개혁조치들은 ‘신사회주의 운동’으로도 불린다. 빈곤퇴치와 동시에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연대의 정신에 기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운영, 친환경적 개발 등의 방향이 제시됐다. 그의 개혁입법은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반차베스 쿠데타를 일으킬만큼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반대자들은 그를 독재자로 묘사한다.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김달관 교수는 “독재자라는 말은 우파 기득권 세력의 라벨붙이기”라며 “누구의 독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사회에서 배제되고 타자화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차베스에 우호적인 좌파진영에서도 양극화를 순화시키고 천연 자원에 대한 주권을 강화한 것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완전히 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너무 강력한 국가주의”에는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차베스가 결정하고, 차베스가 발표”하면서 차베스 이외의 대안적 리더십이 자라날 공간도 공동의 토론공간도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적 양극화도 문제다. 차베스 지지층이 결집하며 이룬 대대적인 사회개혁은 그에 못지않게 반대세력도 결집시켰다. 2006년 선거부터 60/40, 49/51, 55/45 식의 대립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석유에 의존하는 한 차베스의 ‘신사회주의 혁명’이 지속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신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김 교수는 “브라질의 룰라가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다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자본주의가 끝난다고 보고 ‘신사회주의’라는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에콰도르나 볼리비아는 1492년 스페인 정복전 원주민들의 방식대로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반미주의와 중남미 통합

차베스는 집권 이후 줄곧 반미 외교를 폈다. 자신의 집권 14년을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부른 것도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남미를 해방시키고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시도했던 시몬 볼리바르처럼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쯤으로 여기며 정치·경제적으로 개입해왔던 미국에 맞서 중남미가 단결해야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미는 극복할 대상과 세력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줘 내부적인 통합과 응집력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했다.

차베스는 석유를 이용해 중남미의 정치적 통합을 시도했다. ‘봉이 김선달’식의 외교였다. 2006년 국유화 조치로 서방 석유사들이 내는 로열티와 법인세를 올려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이미 2000년부터 OPEC과 협력해 석유 감산에 나서 유가를 높여왔기 때문에 추가된 비용에도 이득을 남길 수 있었던 서방 석유사들은 차베스의 조치를 받아들였다. 2005년에는 카리브해 석유동맹인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를 출범시켰다. 석유를 시장가격보다 낮게 공급해 가난한 수입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중남미 통합운동의 실질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중남미가 뭉쳐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의 ‘혁명’이 지속될지 미완에 그칠지는 그간의 사회개혁 조치들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얼마만큼 뿌리를 내렸느냐에 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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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빚지다4 - 꿈의 공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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