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6.9-2012.10.1)

 

 

 

Eric Hobsbawm dies, aged 95 [Guardian 2012.10.1]

 

Lifelong Marxist, whose work influenced generations of historians and politicians, dies after long illness

 

Eric Hobsbawm, one of the leading historians of the 20th century, has died, his family said on Monday.

 

Hobsbawm, a lifelong Marxist whose work influenced generations of historians and politicians, died in the early hours of Monday morning at the Royal Free Hospital in London after a long illness, his daughter Julia said. He was 95.

 

Hobsbawm's four-volume history of the 19th and 20th centuries, spanning European history from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fall of the USSR, is acknowledged as among the defining works on the period.

 

Fellow historian Niall Ferguson called the quartet, from The Age of Revolution to 1994's The Age of Extremes, "the best starting point I know for anyone who wishes to begin studying modern history".

 

Hobsbawm was dubbed "Neil Kinnock's guru" in the early 1990s, after criticising the Labour party for failing to keep step with social changes, and was regarded as influential in the birth of New Labour, though he later expressed disappointment with the government of Tony Blair.

 

Ed Miliband, the Labour leader, described Hobsbawm as "an extraordinary historian, a man passionate about his politics and a great friend of my family".

 

He said: "His historical works brought hundreds of years of British history to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He brought history out of the ivory tower and into people's lives.

 

"But he was not simply an academic, he cared deeply about the political direction of the country.

 

"Indeed he was one of the first people to recognise the challenges to Labour in the late 1970s and 1980s from the changing nature of our society

 

"He was also a lovely man, with whom I had some of the most stimulating and challenging conversations about politics and the world. My thoughts are with his wife, Marlene, his children and all his family."

 

Hobsbawm's lifelong commitment to Marxist principles made him a controversial figure, however, in particular his membership of the British Communist party that continued even after the Soviet invasion of Hungary in 1956.

 

He said many years later he had "never tried to diminish the appalling things that happened in Russia", but had believed in the early days of the communist project that "a new world was being born amid blood and tears and horror: revolution, civil war, famine. Thanks to the breakdown of the west, we had the illusion that even this brutal, experimental, system was going to work better than the west. It was that or nothing."

 

Hobsbawm was born into a Jewish family in Alexandria, Egypt, in 1917, and grew up in Vienna and Berlin, moving to London with his family in 1933, the year that Hitler came to power in Germany. He studied at Marylebone grammar school and King's College, Cambridge, and became a lecturer at Birkbeck University in 1947, the beginning of a lifelong association that culminated in his becoming the university's president.

 

He became a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 in 1978 and was awarded the companion of honour in 1998.

 

He is survived by his wife, Marlene, his daughter, Julia, and sons Andy and Joseph, and by seven grandchildren and one great-grand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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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의 하늘



20120827 인천 부평 갈산동 콜트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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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쌍용차 희망과 연대의 날-함께 걷자! 함께 살자! 함께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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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미술가 모임 - 학고재,에무,룰루랄라















20120601 학고재, 에무, 민예총 룰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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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미술씨>展

 

나는 파견미술가?

 

http://blog.daum.net/emuspace/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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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기계>展-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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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광장을 희망의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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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희망버스, 우리 시대의 전태일들

지난 주 경동 선배와 정진우 실장 보석 석방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이런 행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산 가느라 참석 못해 많이 아쉬웠지만, 전미영 작가님과 유아 선배 덕에 어머니 사진이나마 쓸 수 있어서 위안이 됐다.


“노동자의 어머님, 저희 싸움에 힘과 용기를”

이소선 묘역 찾은 김진숙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시대의 전태일들, 이제야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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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S 난조

이 모니터, 저 모니터 쓰려니 골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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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2012,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강신준 - 『자본』 번역자 ·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저자 ·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한 역사적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감된 시대에 묻혀 마르크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회체제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 거대담론은 한낱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거시적인 사회체제 대신 미시적인 개인의 일상이 문제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문을 열었다. 소위 포스트모던의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죽은 자가 산 자를 내쫓는” 마르크스의 잠언이 마르크스 자신에게서 실현될 줄이야. 2008년 세계공황이 발발하면서 포스트모던의 바람은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시적 미풍에 불과한 것인지를 앙상하게 드러내었다.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벌써 3년을 넘기고 있는 공황은 미시적 일상의 분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체제 그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묘비명 뒤로 사라졌던 마르크스는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왔다. 공황을 일으킨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에 대한 분석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마르크스에게서만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부활하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강의에 수강생들이 다시 몰려들고 그의 책은 판매가 급증하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해롤드 제임스의 선언대로 “마르크스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만은 여기에서 예외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엉뚱하게도 마르크스 대신 케인스가, 체제 변혁의 변증법 대신 윤리적인 정의가 사회적 이목을 끌고 있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한국에는 부활할 마르크스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마르크스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87년 『자본』의 번역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곧이어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현실 사회주의가 와해되었다. 곧바로 포스트모던의 바람이 수입되었고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바람은 채 불기도 전에 잦아들고 말았다. 학계는 물론이고 노동운동, 사회운동 어디에도 마르크스는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아니 한 번도 자리를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공황의 발발과 함께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마르크스의 바람이 한국에서는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공황과 함께 사회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에 대한 변화의 갈망은 터져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대안의 희망은 한국 사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촛불집회가, 용산참사가, 쌍용자동차가, 그리고 희망버스가 모두 참혹한 모순에 대한 변화의 갈망을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대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가 고민하던 1848년 유럽의 상태를 그대로 닮아 있다. 변화의 갈망은 혁명에 담겼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과학적 지렛대가 그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위업은 바로 이 과학적 지렛대를 직접 제시했다는 점에 있고 그가 지난 천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절망이 어두운 까닭은 바로 이 과학적 지렛대, 마르크스의 부재 때문이다. 그래서 2012년 지금 한국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를 얘기해야 한다. 그것도 진지하게 얘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리고 그것만이 오늘 한국사회의 참혹한 절망에 희망의 빛을 열어줄 수 있는 과학적 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실린 사진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리고 있다. 바로 지금 한국이 마르크스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시대를 맞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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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소통의 작업: 신자유주의 거리를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기록과 소통의 작업: 신자유주의 거리를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광석 - 사이방가르드저자 · 평론가 ·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사진은 기록의 매체라 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란 괴물이 삼켜버린 대한민국에서 사진은 어떠해야 하는가? 권력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꼼수’들이 판치는 현실에서 사진은 그 피울음과 허상을 담아야 한다. 커다랗게 멍들고 좌절에 신음하며 미래를 상실한 이들의 모습을 기록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리를 배회한다면 그 질곡의 현실을 『자본』 부록으로 재집필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사회과학자들이 해야 할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불러들이는 일에 사진작가들이 나섰다. 우리의 생채기 난 현실을 기록하는데, 르포 사진가인 이상엽, 포토저널리스트 정택용,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현린과 홍진훤이 뭉쳤다. 이상엽은 4대강과 도시 재개발의 폭력성을, 정택용은 오랜 기간 기륭전자와 쌍용차 노동자의 힘겨운 싸움을, 현린은 평택 미군기지와 촛불집회를, 홍진훤은 용산참사의 현장을 사진 속에 담아왔다. 이들 네 명은 사진계에서 이미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들이는 주술사들로 통한다. 힘없는 이들의 한복판에서 사진을 통해 리얼리즘의 미학적 실천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번 「TAKE LEFT」는 바로 이들 주술사들이 벌이는 마르크스를 귀환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사진의 기록은 감흥과 소통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TAKE LEFT」는 기록을 나누고 공유하는 미학적 작업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들 넷의 전위적 작업들이 전시의 중심 테마이지만, 직업적 사진작가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기록의 작업에 함께 참여하고 감흥의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새로운 사진의 소통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술사들은 네이버, 페이스북, 플리커, 트위터 등에 누리꾼들의 공동작업을 위한 소통의 공간을 마련했다. 누리꾼들의 참여도에 따라 ‘빨간책’ 증정이란 유인 아닌 유인책을 통해 누리꾼들의 사진 공모를 몇 차례 걸쳐 진행했다. 또한 공유나 펌, 사진 전시에 관한 설문 공모들을 통해 이들은 자신을 닮은 더 많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만들어낸다.

 
한국 사회를 집어삼킨 신자유주의란 괴물에 맞서 오늘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벌이는 투쟁은 새롭고 신선하다. 전시기획 「TAKE LEFT」가 취했던 대중 소통의 방식은 이 점에서 특별하다. 먼저 최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전시기획의 프로모션과 누리꾼 참여를 이끌었다. 들불과 같이 퍼지는 소셜미디어 내 정보 파급력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되살리는 작업에 효과적이었다. 둘째, 단순히 전시공간을 통한 보여주기가 아닌 전문작가와 일반인의 공동작업과 해우를 통한 마르크스의 유령 복원이 이뤄진다. 전시 기획의 제안은 전문 사진작가들에 의해 이뤄지나, 나머지 작품들은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공모작을 통해 충원되었다. 산개한 아마추어리즘과 이의 문제의식을 전문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만나는 중요한 장으로 전시기획을 활용한다. 셋째, 대중과 전문 사진작가들이 함께 마르크스의 유령에 대한 사진 아카이브 즉 기록 작업을 수행하며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장으로써 그 기획의 참신성이 엿보인다.

 
카메라를 메고 나타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우리는 전문작가와 누리꾼을 연결하는 기록과 소통의 네트워크를 볼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피폐화된 서울과 대한민국 거리 곳곳을 볼 수 있다. 「TAKE LEFT」를 통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현한 이유는 단순히 사진을 통해 기록과 소통의 미학 작업을 추구하는 것에 국한되진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번 전시기획의 의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로부터 정념을 받아 지배의 전략을 벗어난 저 다른 곳, 이상향을 공유하는 저항과 연대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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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

"정치란 선악을 판단하는 종교행사가 아닐세.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라네.
그래야 '더 나쁜 놈들'이 점차 도태돼, 종국엔 '덜 나쁜 놈'이 좋은 사람으로 바뀌어 갈 것이 아닌가.
정치하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모두 다 도둑놈들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기분이야 시원하겠지만,
결국 더 나쁜 놈, 더 도둑놈들을 두둔하는 꼴이 된다는 말일세."

- 함석헌, 청년 김성훈에게 한 말 중에서(<작은 것이 아름답다> 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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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고립되었다』 기륭 사진집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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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1947.2.14-2011.12.30)


김근태의 요즘 생각
2012년을 점령하라

세계는 격동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상징되는 잔혹한 유럽의 여름, 월가를 점령하자는 뉴욕의 가을, 그리고 월가점령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공감, 급기야 10월 15일 전 세계 곳곳에서 월가점령시위 동참......

월가점령시위가 확산되자 미국의 언론, 학계,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보수 쪽에서는 폭도라는 말까지 사용해가면 월가점령운동을 폄하하고 있고, 진보 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역사의 순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월가점령에 나선 사람들이 폭도로 여겨지지도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당장 붕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양 진영의 주장이 워낙 강력하고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관계로 자칫 생각과 판단의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월가점령운동에 대한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차분히 묻고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선 미국인들은 왜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치고 있을까.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왜 월가점령에 공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금융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월가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티파티의 압력에 굴복해 길을 잃은 공화당과 의회에 대한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다.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티파티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있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냉혹해서 그들이 공화당을 장악한 티파티 정도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감세가 중지되거나 약간 다시 오르거나 다음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되거나 일뿐이다. 이런 사실을 2008년 촛불집회를 했던 우리는 너무 잘 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한다.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미국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처럼 경선에 뛰어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해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정치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전자가 쉽고 확률도 높다. 비호감일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2011년 10월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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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카메라 메고 서울에 오다, TAKE LEFT



TAKE LEFT




마르크스, 카메라 메고 서울에 오다

이상엽, 정택용, 현 린, 홍진훤/갤러리 나우/2012년 1월 25일~31일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두고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완성을 선언한 후 다음 해, 자크 데리다는 자본주의로 인한 착취와 빈곤이 남아 있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들Les spectres de Marx” 은 언제든 다시 귀환한다고 반박한다. 이때 데리다는 햄릿을 인용하는데,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원혼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지만 동시에 햄릿은 그런 자신의 상황을 두고 이렇게 탄식한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아, 저주스런 낭패로다. 그걸 바로 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The time is out of joint. O cursed spite. That ever I was born to set it right.” 아직 끝이 아니라고 반박은 했지만 데리다에게도 그 시절의 “지금maintenant” 죽은 마르크스의 명령을 “지키기maintenant”로 맹세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고 저주와도 같았던 것.

그 로부터 20년 후 ‘지금’,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자본주의의 메카 뉴욕 월스트리트가 붕괴되었고, 유럽 전체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지금’ ‘지키기’ 위해 맹세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이고, “그걸 바로 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탄식하는 자도 자본주의자들이다. 심지어 국유화라는 공산주의적 결단까지 서슴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크스의 유령이 귀환한 것일까? 어긋나 있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은 것일까? 아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겠다고 거리로 나온 이들이 증언하듯, 정작 그 국유화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다시 자본가들이라는 점에서 이 유령spectre은 다만 환영spectacle이다. 하지만 어떤가? 정말 마르크스의 유령이 귀환한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유령과 환영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르크스의 유령을 초대하기로 했다. 1999년 이미 뉴욕을 다녀갔으니, 이번이 최초의 귀환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아니라 하워드 진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Marx in Soho] 을 통해 무대에 올랐던 것. 그때 그는 자신을 맹신하는 자들에게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충고했지만, 10년 후 뉴욕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들 아는 대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 2012년 서울이라고 해서 안 될 것 없다. 다만 이번엔 연극이 아니라 사진이다. 하지만 그의 심령사진을 찍어 전시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번엔 색다른 여행 조건을 제시했다. 서울에는 사진가로서 방문해 달라는 것. 좌파의 지주 마르크스의 유령spectre은 환영spectacle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지금’ 무엇을 보았고 ‘지키기’ 원하는지 보여 달라는 것. 이른바 ‘TAKE LEFT’ 프로젝트.

이 번 마르크스의 귀환 여행에는 좌파로 찍히고 좌파로 찍기를 마다 않는 이상엽, 정택용, 현린, 홍진훤 등 네 명의 사진가가 동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귀한 여행을 네 명만 독점할 수는 없는 노릇. 좌파를 잡기 위해서건 좌파로 찍기 위해서건 동행을 원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네이버, 페이스북, 플릭커, 트위터 등에 TAKE LEFT 공간을 마련한다. 이 가상공간의 문이 열리는 때는 2011년 12월 25일, 예수가 태어났다는 날. 21세기 이 땅을 방문한 마르크스라면 주목하리라 싶은 사건을 사진에 담아 올리면 선별 과정을 거쳐 현실공간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전시는 2012년 1월 25일부터 1월 31일까지 갤러리 나우에서 진행된다. 전시기간 중에는 마르크스의 유령이 선정한 사진들을 두고 토론회 TALK LEFT도 열린다. (문의. 02-725-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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