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508 -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 유명자
20140829 서울 혜화동.
20140829 서울 혜화동.
20140826 경남 밀양 부북면 위양마을, 평밭마을.
20140823 경북 칠곡 스타케미칼 앞. 희망버스 사회자 유제선.
20140824 경북 칠곡 스타케미칼.
"내가 차광호다! 먹튀자본 박살내고! 현장으로 돌아가자!!"
20140723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안.
20140723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안.
20140723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식당.
"6년 만에 공장 식당밥 먹어봐."
"6년 만에 이 계단을 오르네."
20140723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안. 6년 만에 돌아본 라인.
"여기가 제가 일하던 라인이에요."
"점심 먹고 저기서 족구 참 많이 했는데..."
20140717 경기 평택역 앞. 김득중 쌍용자동차지부장 평택을 국회의원 후보 출정식.
20140717 경기 평택역 앞. 김득중 쌍용자동차지부장 평택을 국회의원 후보 출정식.
20140709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앞.
20140628 충북 옥천. 고공농성 259일차.
‘우리’와 이어져 있는 유성 투쟁
여느 싸움과 마찬가지로, 2011년 5월 18일 무렵 알려지기 시작한 유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러 굵직한 싸움들 속에 있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지켜내려고 그해 6월 ‘희망버스’가 맨 처음 출발하기 전부터 혼자 혹은 파견미술팀으로 크레인에 오르내리며 사진을 찍던 때였다. 쌍용자동차는 어떤가. 새해가 되자마자 열두 번째 죽음을 시작으로 계속 죽음이 이어지는 바람에 그 죽음의 행렬을 끊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였다.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이 먹튀자본에 맞서 상경해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던 때였고,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은 집단 삭발 뒤 1,200일이 넘도록 싸우고 있던 때였다. 2005년부터 사진으로 담던 기륭전자분회 노동자들도 여전히 다른 투쟁사업장들과 연대하며 싸우고 있었고, 지금 주목 받고 있는 삼성 백혈병 피해자들도 거대자본에 맞서 힘겹지만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 밖에 가보지 않은 수많은 곳에서 정리해고 문제, 비정규직 문제, 온갖 사회문제들이 넘쳐나던 때 유성 싸움이 하나 더 생겼다.
마음과는 달리 모든 현장을 가볼 수는 없다. 모든 현장을 가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5월 18일의 용역폭력이 터지고 며칠 뒤 아산의 유성기업에 처음 가보긴 했지만, 그 뒤로 좀처럼 갈 틈을 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던 중 쌍용차 결의대회에 참석했다가 억지로 다시 들르게 된 것은 홍종인 지회장의 고공농성 때문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데 고공농성만한 것은 별로 없다. 현장의 사진들을 몇 년 찍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온갖 고공농성 사진이 쌓인 것을 문득 생각하게 된 뒤부터 이 마음 불편한 사진들은 그리고 현장들은 챙길 수 있는 대로 챙겨보자는 심정으로 찍었고 유성 역시 마찬가지 현장이 되어 있었다. 홍종인 지회장이 151일 만에 2013년 3월 20일 굴다리에서 내려오고 반 년 만에 다시 충북 영동공장 이정훈 지회장과 옥천의 광고탑 고공농성에 돌입했을 때 찾아갔던 것도 그것이 다른 투쟁이 아닌 고공농성이기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고공농성이 아니었으면 옥천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서울의 사진쟁이 조차 오게끔 만들기 때문에 고공농성을 하는 것이 아닐까. 자본에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으나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졸아붙게 만드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임이 분명하다.
누군가 하늘로 오르면 생존을 위해 이어지는 ‘생명줄’의 모습에도 관심이 가고, 끼니를 마련하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올라간 이들이 외롭지 않게 뭔가를 끊임없이 조직하며 노심초사하는 땅의 사람들에도 관심이 가고, 그러다가 하늘 아래를 지키며 한뎃잠을 자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관심이 가는 것이 고공농성이다. 반 년 만에 두 번이나 하늘로 오른 곳이 아니었다면 유성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공농성이 아니었어도 결국 유성에 갔을 것이다.
한진중공업에 희망버스가 다녀간 여름, 한진 노동자들의 가족들을 만나 서로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출발한 ‘희망열차’에서 쌍용차 가족들과 더불어 유성 가족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2013년 5월 10일 송전탑 고공농성을 벌이다 171일 만에 내려온 쌍용차 해고자들을 맞이하는 인파 속에서 자신도 비좁은 굴다리 농성장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다 건강 악화로 내려온 홍종인 지회장이 목발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무덥던 여름날 밤, 쌍용차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 앞 한쪽에서 올빼미가 그려진 단체복을 입고 공동 투쟁하는 유성 노동자들을 봤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문제는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구술사를 엮은 책 『밀양을 살다』에서 단장면 용회마을의 구미현 님도 이렇게 말한다.
“내 혼자 무심히 살 수는 없구나. 사회의 끈은 어떻게든 엮여서 이 송전탑 줄을 따라서 내한테 또 따라왔어요. 송전탑 문제가 어디 이 전기 한 가지 문제입니까. 모든 사회문제가 완전히 종합돼서 나타내지는 거 아닙니까.”
‘사회적 합의’ 전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던 기륭전자분회의 농성장 앞에 있으면 경북 구미의 한국합섬, 코오롱 노동자들을, 전남 순천의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인천의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콜트콜텍 해고자들을, 강원도 옥계의 라파즈-한라 노동자들을, 울산·전주·아산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경기도 화성의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하이텍알씨디 노동자들을, 주연테크 노동자들을, 철거민과 노점상들을, 코레일 승무원들을, 학습지 노동자들을, 종교인들을, 학생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연대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까닭이 구미현 님의 말 속에 담겨 있다. ‘희망’이란 이름을 붙인 버스, 열차, 여객선, 비행기가 한진중공업으로 강정으로 밀양으로 유성으로 떠났던 까닭도 여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성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지 않았다면 가보지 않았을 테지만, 동시에 다른 어떤 방식의 투쟁을 했든지 간에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싸우는 우리의 문제와 이어져 있다면 함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정훈 영동지회장이 240일이 넘도록 옥천 광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건만 하늘로 오른 사람들이 발 디딘 곳만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이 불편함이라니... 건강하고 당당하게 내려오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기를 바랄 뿐.
『우리, 노동자로 살아가다』 중..
20140612 경북 칠곡. 고공농성 17일차.
20년 청춘을 바친 공장과 기계
차광호의 굴뚝일기(1)
한여름 땡볕 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아침부터 햇빛이 강열하게 굴뚝을 비친다. 45m 굴뚝에 올라온 지 24일,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잠을 제대로 못 이룬다. 몸을 많이 상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하게 운동을 한다.
굴뚝의 하루는 길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느리게 흘러간다. 아침저녁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집회시간, 멀리서 찾아온 동지들을 내려다보며 짧게 하는 통화 시간과 식사시간을 빼면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많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책을 들어보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굴뚝에서 바라보는 구미의 풍경이 새롭다.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서 보이는 산 밑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스물다섯에 스타케미칼의 전신인 한국합섬에 들어와 20년이 넘게 지났으니 청춘을 꼬박 이 공장에 보냈다.
한국합섬 입사할 때도 이렇게 더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구미공단은 광고판, 전봇대 할 것 없이 붙일 수 있는 곳은 모두 구인 광고로 도배되던 시절이다. 지금의 구미는 예전과 완전히 바뀌어 일자리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나오는 일자리는 여지없이 비정규직에 최저임금을 받고 12시간 맞교대하는 나쁜 일자리 뿐이다.
스물다섯 시절 구미의 여러 섬유회사들에 입사원서를 냈다. 친구들과 2박 3일을 일정으로 동해안 여행을 갔다가 차가 많이 막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반바지에 샌들을 신은 채로 면접을 봐야 했다. 그랬는데도 출근하라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고, 고민 끝에 여성노동자가 많은 한국합섬으로 결정했다.
한국합섬이 잘 나갈 때였다. 한국합섬 1공장에 입사해 공정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하루는 현장에서 고함소리가 나고 난리가 났다. 알고 보니 2공장 가동을 위해 전출을 해야 하는데 반장이 일방적으로 사람을 지목해서 보내려는 것 때문이었다. 선배들이 중재에 나섰고 결국은 내가 2공장으로 전출가는 것으로 현장은 조용해졌다.
얼마 있다가 2공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조건이 안 맞는지 몇날며칠을 일을 해도 정상 제품이 나오지 않았다. 툭하면 타부서에 지원을 나가서 가서 상노동을 한 달 가량 해야 했다. 그제서야 폴리에스텔 원사가 나왔다.
새로 들어온 후배들과 신나게 일을 하고 있는데, 노동조합 대의원을 맡아 달라는 섭외가 들어 왔다. 노동조합을 전혀 몰랐지만 선후배가 같이 한다는 것과 바른말은 참지 못하는 성격에 승낙하고 노조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렇게 시작한 한국합섬 입사와 노동조합 입문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젊은 나이였다.
나와 동료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회사는 경쟁력 있는 특수섬유를 개발하는 일은 소홀히 했고, 원사의 대량생산에만 매달렸다. 잘 나가던 회사가 경쟁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2004년 금강화섬에 이어 2007년 한국합섬이 폐업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는 일자리를 잃었다.
다행히 스타케미칼이 회사를 인수했다. 스타케미칼 김세권 사장은 900억이 넘는 공장을 399억에 인수하고 공장을 돌렸다. 그런데 2년 만에 회사가 어렵다며 회사를 폐업했다. 회사는 기계설비를 팔아 300억 원 이상을 챙겼고, 고철과 전선 매각대금 200여억원을 챙기려 하고 있다. 그러고도 400억 가량의 공장 부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나와 동료들의 20년 청춘과 피땀이 배어있는 공장을 지키기 위해 굴뚝에 올랐다. 하루하루가 힘든 시간들이지만 버틸 것이다. 돈이 제일인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존중받고 노동이 대우받는 세상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20080526 서울 구로역 광장.
20140620 서울 구로역 광장.
2008년 기륭전자분회 윤종희 조합원이 14일 동안 올랐던 구로역 광장 교통통제탑.
'사건' 뒤 그가 매달렸던 중간 난간과 사다리를 없애버렸다.
가끔 지나가다가, 언제 저걸 다시 찍나 노려만 보다가 6년만에..
게으르다, 게을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