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거짓말





 



천안함 침몰의 진위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지난 6월 3일 전(前)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그란마>에 기고를 통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카스트로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은 국내에서도 몇몇 신문들의 단신 보도로 화제가 되었지만, 그 전문이 공개적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적은 없기 때문에 이번에 번역을 해서 옮겨봅니다. <그란마> 영문판 홈페이지에 올라온 카스트로의 글을 번역했음을 알립니다. (번역 임승수)

 
(원문 주소 : http://www.granma.cu/ingles/reflections-i/23reflex1-junio.html)

 제국과 거짓말

 나는 이란과 북한에 관해 두 개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글들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임박한 전쟁 위험을 설명하는 글이다. 게다가 북한의 경우는, 미국이 유엔 안보리에 제안한 해법에 대해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면 문제가 풀렸을 것이라는 나의 견해를 얘기했다. 이란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행동 때문에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좌우된다. 이스라엘은 미국 덕분에 핵보유국이 되어서 그 어떤 강대국의 제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53년 6월, 미국이 자국의 이익과 동맹국인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슬람 혁명을 무너뜨리고 모함마드 레자 팔레비 왕을 옹립했을 때,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 그리고 시리아의 일부, 인근 요르단 지역을 차지하고 있지 못했다. 그 지역은 당시 아랍군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랍군단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핵탄두를 장착한 수백기의 로켓이 미국이 제공하는 최신식 항공기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아랍국가이건 아니건, 무슬림이건 아니건, 목표물의 수 미터 안에 떨어질 수 있는 이스라엘 미사일의 행동반경 안에 들어가는 역내 모든 나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 그러니까 5월 30일, 내가 ‘제국과 마약’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한 그때에,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고향이었던 땅의 좁은 지역에 갇힌 15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서 식량, 의약품 등을 싣고 가던 구호선에 잔인한 공격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거리, 여가, 공부, 가족문제 등 먹고 살기 위해 필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 행성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볼 여유가 없다. 짐짓 고상한 척하며,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둘러싼 곤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렸다. 그런 사람들은 기뻐하며 웃을 여유가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현실들을 침착하게 관찰할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정말 이상한 조작극이 있다. 북한이, 첨단기술로 설계되고 광대역 소나 시스템과 수중 음파 탐지기를 보유한 남한의 천안함을 남한 쪽 해역에서 침몰시켰다고 한다. 북한은 이런 끔찍한 짓을 해서 남한 해군 40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내가 이 문제를 풀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막강한 권한이 있더라도, 그 어떤 정부가 공식 지휘체계를 통해 국적선을 어뢰로 침몰시키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단 한순간도 김정일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결론을 내릴만한 판단근거들이 부족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중국이 안보리에서 대북제재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미국이 통제불능의 이스라엘 정부 때문에 (이란의) 핵무장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6월 1일 저녁 늦게,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밤 10시 30분, 나는 베네수엘라 TV의 유명 프로그램인 “보고서”의 앵커 월터 마르티네즈의 예리한 분석 내용을 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미국이 남한과 북한 각각에게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새 지도자가 여론을 등에 업고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이 이 문제를 풀기위해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토야마의 민주당은 선거에서 엄청난 지지를 얻었는데, 그것은 선진국이자 부자나라가 된 일본에 65년이 넘도록 주둔하면서 마치 일본의 심장부를 단검처럼 겨누고 있는 미군기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 <글로벌 리서치>를 통해서 알려진 정말 놀라운 정보들이 있다. 워싱턴 DC에서 일하는 탐사 보도 기자 웨인 매드센이 쓴 글 덕분이다. 그는 소식통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렸다.

 그 정보들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주장했다. “남한 해군 대잠함인 천안함에 대한 공격은 북한이 한 것처럼 보이려는 위장공격으로 의심된다.”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려는 주요한 목적중 하나는 일본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가 오키나와 해군기지를 이전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하토야마는 천안함 침몰로 조성된 긴장 때문에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결정을 했다고 인정했다. 하토야마의 이런 결정 때문에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이전하지 않으면 연정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사회민주당 당수 후쿠시마 미즈호와의 집권 중도-좌파 연정이 무너졌다. 이는 워싱턴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천안함은 백령도 부근에서 침몰했는데, 그곳은 남한의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 끝 지점이며 북한 해안선의 맞은편에 있다. 백령도는 요새화되어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북한 해안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대잠함인 천안함은 최첨단 소나를 장착하고 있다. 게다가 광대역 수중청음기와 음파 탐지기를 구동하고 있었다. 남한의 소나와 오디오에는 어떤 어뢰나 잠수함, 소형 잠수함의 증거도 없었다. 당시 인근에는 다른 선박의 항해도 없었기 때문에 침몰 당시 바다는 고요했다.”

 “하지만, 백령도는 한미합동 군사정보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특수부대인 네이비 실(Navy SEALS)이 이 기지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천안함 침몰 당시 그 지역에는 한미 연합 독수리 훈련에 참가중인 네 척의 미해군함이 있었다. 의혹의 어뢰 파편의 성분 분석 결과는 그것이 독일제임을 보여준다. 네이비 실은 위장공격을 은폐하기 위해서 유럽산 어뢰 샘플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베를린은 북한 어뢰를 판매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은 이스라엘과 잠수함 및 잠수함 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독수리 훈련에 참가한 USNS 살보(Salvor)가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백령도에 가까이 있었던 것도 의문이다.”

 “살보는 미해군 소속 민간 구조함인데, 2006년 태국만(the Gulf of Thailand)에서 태국 해병대의 기뢰설치작전에 참가했었다. 천안함 침몰 당시 이 구조함에는 12명의 심해 다이버들이 있었다.”

 “급히 기차를 통해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온 북한 김정일이 결백을 주장한 것에 베이징은 만족했으며, 베이징은 천안함 침몰에서 미국 해군, 특히 살보의 역할에 관해 의혹을 가지고 있다. 의혹은 다음과 같다.”

 “1. 살보는 바다 밑 기뢰설치작전에 참여했다. 다시 말해서 대잠기뢰를 바다 밑에 수평으로 붙이는 작업을 했다.”
 “2. 살보는 바다속 기뢰들에 대해 정기검사와 유지보수를 하고 있었는데 검사 중에 기뢰들을 작동 모드로 놓았다.”
 “3. 네이비 실의 다이버가 남한, 일본, 중국의 여론에 영향을 끼칠 비밀계획의 일환으로 천안함에 자기기뢰(magnetic mine)를 부착했다.”
  “한반도 긴장 때문에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베이징과 서울 방문해서 다뤄질 다른 모든 의제들은 쉽게 묻혔다.”

 그래서 미국은 아주 쉽게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이 이끄는 연합정부를 붕괴시킨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비싼 대가를 치뤘지만.

1. 동맹국 남한을 심각하게 공격했다.
2. 미국의 적인 김정일의 일처리 기술과 신속함을 돋보이게 했다.
3. 중국의 주석이 개별적인 행동을 취하고 주요 지도자를 보내 아키히토 일왕과 총리 및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대화를 하면서 중국의 지도력이 부각되었다.

정치 지도자들과 세계의 여론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들을 꿰뚫어보는 비판정신과 양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피델 카스트로 루즈
2010년 6월 3일
오전11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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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망루

20100605 마석 모란공원

하늘 망루
용산철거민 민중열사 묘비 제막식에 바친다 

                                                 송경동

당신들은 가셨는데
내 몸 안의 화기는 가시지 않습니다

돌돌돌 흐르는 강물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넋놓은 마음을 씻어봐도

숲 사이로 부는 신선한 태고의 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이고 걸으며 머리를 식혀봐도

내 가슴의 분노
제 가슴의 미움과 저주는 풀리지 않습니다

하늘 망루
용산철거민 민중열사 묘비 제막식에 바친다

아직도 입이 마르고
피가 쏠리고,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그러나 이제
파란 샌드위치 판넬집을 떠나
정말 파란 하늘 망루로 오르신 영혼들이여

이제는 편안하시길
그날 뜨겁게 솟구쳐 오르던 흰 연기의 숨막힘도 악몽도 공포도 잊고
저 하늘의 하얀 구름들에게 위안 받으시며
그날 빨갛게 다가오던 수천도의 화염과는 다른
따뜻한 태양의 위로 받으시며
차가운 빗물에도 젖지 마시며

하늘 망루로 오르신 영혼들이여
1년동안의 념을 통해
말끔히 깨끗이 씻기워진 영혼들이여

우리를 앞서 가
저 하늘 망루에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짓고
새 생활에 분주할 님들이시여
우리 다시 만날 날을 위해
지금 여기 우리처럼 속닥속닥 즐거우실 님들이시여

여기 우리들 함께 살았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던 시절들에 대한
작은 묘비 하나 세워두고
우리 다시 투쟁의 길로 나서니

부디 잘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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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illance 2010 by Will Varner

Surveillance 2010 by Will Varner.

Just how closely are we being watched? This piece by illustrator Will Varner, called Surveillance 2010, makes us think twice about that que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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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진실'

강의 진실 _ 4대강 사업의 진실 by 푸른영상 from simock on Vimeo.

전국의 4대강 사업 현장을 기록한 영상입니다.
수원교구공동선실현사제연대, 4대강사업저지를위한천주교연대, 푸른영상이 공동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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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대한민국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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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terview with Howard Zinn

하워드 진: 뭔가 바뀌도록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은 이상 결코 적절한 대응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뭔가 마법같은 획기적 책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투쟁, 시위, 농성, 시민불복종 같은 것을 넘어서는 뭔가 대단히 획기적인 마법같은 만병통치약이 있을거라고 믿는 것 같아요. 오직 꾸준하고 일반적인 투쟁과 저항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베트남전을 끝낸 것은 좌파진영이 뭔가 새롭고 극적인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행동들이 오랜 시간을 버티고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매체를 통해서는 뭐가 진행되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저는 전국의 다양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 합니다. 최근 텍사스 오스틴에서 천여명이 모였어요. 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너그럽고 선하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들은 정보가 부족할 따름이지요.


HZ: The responses are never adequate, until they build and build and something changes. People very often think that there must be some magical tactic, beyond the traditional ones-protests, demonstrations, vigils, civil disobedience-but there is no magical panacea, only persistence in continuing and escalating the usual tactics of protest and resistance. The end of the Vietnam War did not come because the Left suddenly did something new and dramatic, but because all of the actions built up over time.

If you listen to the media, you get no sense of what's happening. I speak to groups of people in different parts of the country. I was in Austin, Texas recently and a thousand people showed up. I believe people are basically decent, they just lack information.

                                                                                                  by Howard Zinn and Shelly R. Fredman ; Tikkun; May 2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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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1932.10.8~2010.3.11)


www.urisesang.co.kr               

일체 장례의식 없이 ‘다비’만/ 법정스님 입적…‘무소유’ 실천 [불교신문 2010.3.11]

서울 길상사 전 회주 법정스님이 오늘(3월11일) 오후1시51분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9세, 법랍 56세. 법정스님의 법구는 현재 서울 길상사에 안치돼 있으며, 오는 13일 오전11시 조계총림 송광사 다비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다비식 이외에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3월13일 오전11시 송광사서 다비

법정스님은 대표적인 저서인 <무소유>를 몸소 실천해 세간을 더욱 숙연하게 하고 있다. 법정스님 다비준비위원회 대변인 진화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은 오늘(3월11일)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법정스님의 유지를 전했다.
 
법정스님은 지난 10일 밤 입적을 예감한 듯 상좌에게 당부의 말씀을 남겼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또 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40여년 전인 지난 1976년 발간된 <무소유>에서 약속한 바를 지킨 것이다.
 
진화스님은 법정스님이 평소 당부했던 유지를 받드는 차원에서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저서들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법정스님은 “그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송광사에서 거행되는 스님의 장례의식은 영결식 등 일체의 의식 없이 다비만 진행된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는다”고 진화스님은 밝혔다. 
 
장례의식은 없지만 스님의 가는 길을 안타까워하는 추모객들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불일암에 간단한 분향소가 마련됐다. 법정스님의 송광사 운구 일정 등 향후 계획은 오늘 저녁쯤 따로 발표될 예정이다. 진화스님은 “송광사에서 스님들이 상경하는 중”이라며 “송광사와 문도 스님들과 협의해 구체적인 일정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법정스님은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했다. 1954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해인사에서 강원 대교과를 수료했다.

법정 스님께 - 이해인 수녀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 법정스님 "대운하 구상은 망령" [한겨레 2008.4.20]

추모특집 / ‘무소유 삶’ 법정스님 [불교신문 2010.3.13]

■ 불교신문으로 보는 법정스님 어록 [불교신문 2010.3.13]

■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 행복했습니다"/ 법정스님 다비 엄수 [불교신문 2010.3.13]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역시 이단아였다 [조현글방 20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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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일 조합원 동지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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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Howard Zinn (1922.8.242010.1.28)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하워드 진 2008년 강연 - Three Holy Wars>



■ Howard Zinn, historian who challenged status quo, dies at 87 [Boston Globe 2010.1.28] 

Howard Zinn, the Boston University historian and political activist who was an early opponent of US involvement in Vietnam and a leading faculty critic of BU president John Silber, died of a heart attack today in Santa Monica, Calif, where he was traveling, his family said. He was 87.
 
"His writings have changed the consciousness of a generation, and helped open new paths to understanding and its crucial meaning for our lives," Noam Chomsky, the left-wing activist and MIT professor, once wrote of Dr. Zinn. "When action has been called for, one could always be confident that he would be on the front lines, an example and trustworthy guide."
 
For Dr. Zinn, activism was a natural extension of the revisionist brand of history he taught. Dr. Zinn's best-known book,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80), had for its heroes not the Founding Fathers -- many of them slaveholders and deeply attached to the status quo, as Dr. Zinn was quick to point out -- but rather the farmers of Shays' Rebellion and the union organizers of the 1930s.
 
As he wrote in his autobiography,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1994), "From the start, my teaching was infused with my own history. I would try to be fair to other points of view, but I wanted more than 'objectivity'; I wanted students to leave my classes not just better informed, but more prepared to relinquish the safety of silence, more prepared to speak up, to act against injustice wherever they saw it. This, of course, was a recipe for trouble."
 
Certainly, it was a recipe for rancor between Dr. Zinn and Silber. Dr. Zinn twice helped lead faculty votes to oust the BU president, who in turn once accused Dr. Zinn of arson (a charge he quickly retracted) and cited him as a prime example of teachers "who poison the well of academe."
 
Dr. Zinn was a cochairman of the strike committee when BU professors walked out in 1979. After the strike was settled, he and four colleagues were charged with violating their contract when they refused to cross a picket line of striking secretaries. The charges against "the BU Five" were soon dropped, however.
 
Dr. Zinn was born in New York City on Aug. 24, 1922, the son of Jewish immigrants, Edward Zinn, a waiter, and Jennie (Rabinowitz) Zinn, a housewife. He attended New York public schools and worked in the Brooklyn Navy Yard before joining the Army Air Force during World War II. Serving as a bombardier in the Eighth Air Force, he won the Air Medal and attained the rank of second lieutenant.
 
After the war, Dr. Zinn worked at a series of menial jobs until entering New York University as a 27-year-old freshman on the GI Bill. Professor Zinn, who had married Roslyn Shechter in 1944, worked nights in a warehouse loading trucks to support his studies. He received his bachelor's degree from NYU, followed by master's and doctoral degrees in history from Columbia University.
 
Dr. Zinn was an instructor at Upsala College and lecturer at Brooklyn College before joining the faculty of Spelman College in Atlanta, in 1956. He served at the historically black women's institution as chairman of the history department. Among his students were the novelist Alice Walker, who called him "the best teacher I ever had," and Marian Wright Edelman, future head of the Children's Defense Fund.
 
During this time, Dr. Zinn became active in the civil rights movement. He served on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the most aggressive civil rights organization of the time, and participated in numerous demonstrations.
 
Dr. Zinn became an associate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at BU in 1964 and was named full professor in 1966.

The focus of his activism now became the Vietnam War. Dr. Zinn spoke at countless rallies and teach-ins and drew national attention when he and another leading antiwar activist, Rev. Daniel Berrigan, went to Hanoi in 1968 to receive three prisoners released by the North Vietnamese.
 
Dr. Zinn's involvement in the antiwar movement led to his publishing two books: "Vietnam: The Logic of Withdrawal" (1967) and "Disobedience and Democracy" (1968). He had previously published "LaGuardia in Congress" (1959), which had won the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s Albert J. Beveridge Prize; "SNCC: The New Abolitionists" (1964); "The Southern Mystique" (1964); and "New Deal Thought" (1966).
Dr. Zinn was also the author of "The Politics of History" (1970); "Postwar America" (1973); "Justice in Everyday Life" (1974); and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1990).
 
In 1988, Dr. Zinn took early retirement so as to concentrate on speaking and writing. The latter activity included writing for the stage. Dr. Zinn had two plays produced: "Emma," about the anarchist leader Emma Goldman, and "Daughter of Venus."
 
Dr. Zinn, or his writing, made a cameo appearance in the 1997 film "Good Will Hunting." The title characters, played by Matt Damon, lauds "A People's History" and urges Robin Williams's character to read it. Damon, who co-wrote the script, was a neighbor of the Zinns growing up.
 
Damon was later involved in a television version of the book, "The People Speak," which ran on the History Channel in 2009. Damon was the narrator of a 2004 biographical documentary, "Howard Zinn: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On his last day at BU, Dr. Zinn ended class 30 minutes early so he could join a picket line and urged the 500 students attending his lecture to come along. A hundred did so.
 
Dr. Zinn's wife died in 2008. He leaves a daughter, Myla Kabat-Zinn of Lexington; a son, Jeff of Wellfleet; three granddaugthers; and two grandsons.
 
Funeral plans were not avail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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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1주기 추모 문화제 "용산, 진실의 꽃으로 부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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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일만의 안식

20100109 마석 모란공원.

355일만에 차가운 냉동고를 나와 죽은 자의 자리를 찾은 용산참사 희생자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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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갤러리

20100105 용산 레아갤러리.

이날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범국민장 장례위원회를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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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20091208 용산 남일당 옆. 유족 유영숙 씨의 손에 들린 용산참사 헌정문집『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지난 8일 저녁 용산참사 현장에서 문인과 예술인들이 만든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의 헌정식이 열렸습니다. 유족들한테 노란 표지의 책을 헌정한 뒤 평론가들이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이 터진 건 세 평론가 중 이선우 씨가 ‘그 죽음은, 우리 모두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무치는 경고였다’라는 구절을 읽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이선우 평론가가 울고 유족들이 울고 모두가 울었습니다. 망루를 불태운 것은 ‘우리’였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던 사람들의 양심이 정말 사무치게 아쉽습니다.


 

다시, 이것은 사람의 말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망루를 불태운 것은 우리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내던지고 ‘뉴타운’과 ‘특목고’를 삶의 이유로 받아들인 우리 모두가 한 일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그것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괴물이었으므로 괴물같은 정부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자유와 민주의 공화국이 낳은 기형아가 아니라 자본과 속물의 제국이 낳은 우량아다. 그들은 무자비한 재개발 사업을 밀어 붙였고 무고한 사람 6명을 죽였으며 그 후로도 당당했다. 우리는 원고인인 동시에 피고인으로서 말한다. 이명박 정권은 살인 정권이다.


그 죽음은, 우리 모두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무치는 경고였다. 그분들을 잊는 일은 우리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는 일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2009년 여름부터 용산으로 갔다. 유족들의 슬픔과 신부님들의 헌신 앞에서 문학은 한없이 무력했지만, 그 뼈아픈 자각 속에서 1인 시위를 했고 글을 썼다. 정의를 믿었고 희망을 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0월 28일 용산참사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희생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해 고인들을 두 번 죽였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의는 승리할 것이고 희망은 배반되지 않을 것이다.


‘6·9 작가선언-이것은 사람의 말’에 이어 이 책을 낸다. 다급하고 절박한 현실이 이 글들을 쓰게 했고 우리는 무능력과 죄책감의 힘으로 겨우 썼다. 추천사를 써주신 문정현님, 조세희님, 한명숙님, 홍세화님, 표지를 만드신 정은경님, 그리고 실천문학사 여러분들의 힘이 이 책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름들 이전에, 분노와 슬픔을 담아 거명해야 할 이름들은 따로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위정자들과 치안관계자들에게 이 책의 가장 차가운 부분을, 망루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유족들과 지금도 용산을 지키고 계신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바친다.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사람의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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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자

20091117 서울 여의도 전국농민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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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 (1908.11.28-2009.10.30)


French Anthropologist Claude Levi-Strauss Dies at 100 [The New York Times 2009.11.3]

PARIS (AP) -- After weeks crossing the high seas, Claude Levi-Strauss breathed in his first lungful of the New World, a perfume tinged with pepper or tobacco. The sensory awakening was the start of a journey that turned a young Parisian scholar into a founder of modern anthropology.

On that 1930s trip that took him across the Atlantic to Latin America, Levi-Strauss' scholarly upbringing guided him on a methodical search for humankind's inner workings as he met tribes in Brazil's jungles. His studies would later electrify --and divide -- the intellectual world with the idea that cultures share similarities underlying their myths and patterns of behavior.

Levi-Strauss' death at age 100 was announced in Paris on Tuesday. French media said he died on Friday.

Born on Nov. 28, 1908, in Brussels, Belgium, to French parents of Jewish origin, he was forced to flee France during World War II after Germany invaded and the collaborationist Vichy regime passed anti-Jewish laws. He ended up in New York, which he called ''the most fruitful period of my life.''

He was widely regarded as having reshaped anthropology, becoming the leading advocate of what is now known as structuralism. His ideas reached into fields including the humanities and philosophy.

France reacted with emotional tributes led by President Nicolas Sarkozy, who called him the ''indefatigable humanist'' and noted his environmental side which led him to worry ''about the disappearance of many living plant and animal species, and ... the impact of man's activities on the planet.''

Koichiro Matsuura, director-general of the U.N.'s Paris-based cultural arm, UNESCO, said Levi-Strauss' theories ''changed the way people perceived each other, striking down such divisive concepts as race and opening the way for a new vision based on recognition of the common bond of humanity.''

As a youngster, Levi-Strauss organized adventurous expeditions into the French countryside. He studied in Paris and went on to teach and travel in Brazil, captivated by that first impression of ''tobacco smell, pepper smell'' and doing much of the research that led to his breakthrough books.

Drafted into the French army only for it to be crushed by the invading Germans, he soon had to flee France for New York, where he became a visiting professor at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He mixed with fellow scholars, spent long hours at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nd lived in a tiny rented room in Greenwich Village.

''Everything I know I learned in the United States,'' he once said.

Despite several job offers to remain in America, he returned to France in 1944 after the liberation of Paris and entered government service, but quit four years later to pursue his scholarly research.

Structuralism -- defined as the search for the underlying patterns of thought in all forms of human activity -- compared the formal relationships among elements in any given system.

Levi-Strauss' classic example was the taboo on incest, present in all societies, which he argued was man's way of promoting and preserving social harmony.

Yet he rejected the title of ''father'' of structuralism, which he said had been badly deformed and its scientific claims exaggerated. He also spoke with modesty of his achievements.

But Setha Low, president of the American Anthropological Association, said Levi-Strauss was one of the most ''innovative and creative theorists that anthropology has ever produced,'' though she said some of his theories are contested. One complaint is that he failed to sufficiently take into account history and the empowerment of individuals.

French anthropologist Philippe Descola, who wrote his thesis under Levi-Strauss' guidance, told AP last year that ''today, nobody shares the entire philosophy of Levi-Strauss,'' but that his influence is still strong.

What was important, he said, was that Levi-Strauss advanced the idea that cultural diversity is a positive thing -- an ''idea that wasn't very popular'' 40 years ago.

Honored by universities worldwide, accepted into the Academie Francaise, home of France's scholarly elite, Levi-Strauss was also a skilled handyman, loved music and believed in the virtues of manual labor and outdoor life.

He was married three times and had two sons, Matthieu and Laurent.

The Academie Francaise said it planned a ceremony of tribute for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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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writers Jenny Barchfield and Elaine Ganley in Paris contributed to this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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