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85호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씀

20110213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엄마,혹시 나 보여?
보여도 보지마.
엄마 못보고 산지가 30년이 넘었네.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나이더라구. 엄마 가버린 나이.나 스무살 때.
그땐 왜 그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나몰라.쉰둘인데.쉰둘일뿐인데..그냥 엄마 많이 아프니까,아부지 뵈기싫어 죽겠는데 자꾸 집에와서 있으라하니까,
졸려 죽겠는데 새벽기도 가라 하니까,복수찬 데 돌미나리가 좋다고 한겨울에 그거 뜯어오라 그러니까,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이니까,갈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적,
솔직히 많았어.그게 젤 걸리고.
엄마 임종 못본거 다행이라고 생각해.새끼들은 죄다 이기적이니까.
이왕 안볼거면 염하는것도 안봐야했는데 그지같은 외삼촌이 억지로 끌고가서 봐 버렸네.
복어처럼 땡땡해선 시퍼런 심줄이 미나리처럼 돋아났던 배가 시커멓게 푹 꺼졌더라구.
난 그게 다 아부지때문이라고 생각했어.엄마뱃속으로 낳지도 않은 언니들 키우면서 쌓인 스트레스거나.
엄마속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게 나때문이란 생각 끝까지 안하려 했지.
엄마.엄마두 그거 알았어?엄마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는 걸 내가 참 좋아한 거.평생 40kg이 안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우리엄마.
그냥 그렇게 달려서 도망가고 싶었다.어디든.
그걸 할수없었던 나는 번번이 엇나가 홀로 탄 자전거를 하염없이 굴려 갈수없는 길까지 가곤했다.
열다섯살 때.꽤 멀리 갔었다.
안돌아가려 했으니까.
근데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내가 자전거 안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산을 내려와 긴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노을 서럽던 저녁.
장날이었던가봐.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던 먼지나던 신작로.
집언저리쯤에서 눈으로 엄마를 찾는데 엄마보다 먼저본 게 저만치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주황색 나이롱 바가지였어.흩어지던 콩나물.콩나물위에 떨어지던 눈물.
부산와서 첫월급.그 눈물나는 돈을받아 엄마 쉐타사고 법랑냄비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다.
엄마 유품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냄비는 선반위에서 박스채로,중학교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쓰고 죽었냐
이누무 이상한 엄마야.
정신 놓았다가도 진수,진수 부르며 눈을 뜨려 기를쓰던 진수도 갔다.
진수는 니가 좀 거둬줘라.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새낄 어떻게 거두냐.
엄마찾아 갔으니까 엄마가 거둬.
첫징역 살때 큰언니가 면회를 왔더라.
외포리에서 그 먼길을 오면서 멀미를 으찌 했는지 입술까지 하얘.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허리펴고 서있지도 못하고 면회시간이 끝났는데 가면서 그러대.
"그르니 엄마가 일찍 죽길 을마나 다행이냐"..그런 말은 박혀.잘 빠지지도 않고.
그러고보니 살면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보다 엄마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날이 더 많았네.
근데두 엄마.보고싶을 때가 있어.한번만,잠깐만이라도,안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어..

-어버이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고공농성 12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자 27년 해고자, 한진 조합원, 김진숙 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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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9 - 한진중공업

20110318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고공농성 72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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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2 - 한진중공업지회

20110213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아래. 그 대차던 노동자 오대일의 눈물.

김진숙 지도위원 14번째 편지글(크레인 고공농성 39일차)

대일아, 한 번도 본적도 없고 얘기를 나눠 보지도 않았지만 얼마 전 촛불집회 때 써 보낸 편지에 나를 누나라고 불러줬으니 편하게 동생이라고 부르마.
내가 해고되지 않았고 너 또한 해고되지 않으면 우린 조립팀에서 김주익 지회장과 함께 이용대 대의원 같은 분들과 조립팀 동료로, 선후배로 평화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해고됐고 너는 해고를 앞두고 있고 김주익 지회장은 죽었다.
노동자에게 해고란 해고될 당시에만 상처받고 아픈 게 아니라 평생을 따라다니는 낙인이고 아물지 않는 상처다.
더군다나 함께 민주노조를 세우겠다고 매일 저녁 만나서 회의하고 토론하고 유인물을 뿌리고 짓밟히고 두들겨 맞아가며 투쟁을 함께했던 박창수 위원원장을 잃고 나는 평생을 죄인으로 살았다.
나 때문에 박창수 위원장이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공분실에서 그 치욕을 겪으면서도 징역살이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나는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너에겐 일곱 살 짜리 딸과 세 살짜리 아들이 있다고 했느냐.
박창수 위원장에겐 여섯 살 짜리 아들과 세 살 짜리 딸이 있었다.
그가 죽고 20년 세월이 넘도록 용찬이가 어떻게 컸는지, 예란이가 몇 학년인지, 그 부인이 어떻게 사는지 한 번도 마음 편히 안부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위원장에 당선되던 날 나는 감옥에 있었고,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땐 그가 감옥에 있었다. 그가 징역에서 출감도 못한 죄수의 신분으로 죽었을 때 나는 수배 중이었다.

몇 달 더 고생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사람이 너울너울 만장 앞세우고 동지들의 어깨에 멘 관에 담겨 영도다리를 넘어 오던 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우는 거밖엔 없었다. 내가 울고 있을 때 아저씨들은 화염병을 들었다.
대일이 네가 선배, 형님이라고 부르는 아저씨들이 안기부에 화염병을 던지며 몇 달을 싸워 지켜낸 생존권이고 노동조합이다.

형님들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고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그 이후로도 동지들의 죽음을 차례차례 묻으며 형님들은 여기까지 왔다. 이젠 너희들이 형님들을 지켜 줄 차례다.
여기서 더 이상 밀리면 안 되지 않겠느냐. 더 이상 빼앗기면 안 되는 거 아니겠느냐.
한 인간의 탐욕을 위해 수백 명이 죽을 순 없는 거 아니냐.
생각만 해도 목이 메이는 우리 새끼들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

울산에서 내쫒기고 그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너를 또 쫒아내겠다는 회사.
설사 이번에 빠진다 하더라도 자본은 더 큰 아픔으로 우리를 짤라 정규직의 씨를 말릴 것이다.
네 동생에게 해고통보서를 보낸 한진 자본.
본가에까지 해고통보서를 보내 부모님들한테 까지 충격을 준 저 짐승만도 못한 놈들과 싸워 꼭 이겨야 하지 않겠느냐.
꼭 이겨서 미칠 듯이 보고 싶은 아이들한테로, 사랑하는 마누라한테로 환하게 웃으며 돌아가자.
네가 형님들을 믿고, 형님들이 동생들을 믿어 준다면 우린 오대일로 이길 수 있다.

한진중공업의 모든 오대일들, 투쟁!

2011년 2월 13일
크레인 고공농성 39일차 저녁촛불문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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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1 - 한진중공업지회

20110213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나이 29에 정리해고란 통보서를 받으니 날개가 꺽인 기분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생긴다지만 너무 빨리 왔네요. 하하하.
하지만 겁은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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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85호 지브 크레인 중간, 이용대 한진중공업지회 대의원

20110110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이용대 대의원은 김진숙 지도위원과 같은 파트 동료였다. 벌써 이십 수 년 전 이야기다. 그 동료를 위해 85호 지브 크레인 중간에서 그를 지키고 있다. 그가 김주익 전 지회장처럼 죽어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살아서 걸어내려올 수 있도록 지키고 있다. 밥을 올려주고 고구마를 올려주고 소식을 올려주고 있다. 1월 6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른 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김 지도위원이 잠에 들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킨다. "내만 찾아싼다"라고 불평하지만, 금새 "여기 있는 게 내 맘이 편하다"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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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20110110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1월 6일 새벽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85호 지브 크레인에 올랐다. 2003년 김주익 당시 한진중공업지회장이 구조조정 중단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129일 동안 농성하다 목을 매고 자결한 장소다.  1월 12일 한진중공업 사측은 290명 정리해고 명단을 부산지방고용노동청에 신청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남긴 글]

1월 3일 아침, 침낭도 아니고 이불을 들고 출근하시는 아저씨를 봤습니다.
새해 첫 출근날 노숙농성을 해야 하는 아저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겨울 시청광장 찬바닥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가장에게 이불보따리를 싸줬던
마누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살고 싶은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고 싶은 겁니다.
지난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한 이후 한진에선 3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짤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 당했습니다.
명퇴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400명을 또 짜르겠답니다. 하청까지 천 명이 넘게 짤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 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그 파리목숨들을 안주삼아 회장님과 아드님은 배당금 176억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정리해고 발표 다음 날.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물 한 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 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 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짤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조합원들 운명이 뻔한데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한진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겁니다.
쌍용차는 옥쇄파업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니라 명단이 발표되고 난 이후
산자 죽은자로 갈라져 투쟁이 힘들어진 겁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려웠는데 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 씨는..  재규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이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                        
                                                                            --- 김진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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