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20120206 부산 영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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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100 - 김진숙 지도위원

20110928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고공농성 266일차.

한 조합원의 전화를 통해 얼굴 보다. 점점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늘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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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사진관에서

20110731 부산 영도 3차 희망버스 중 소금꽃사진관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가는 조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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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님의 2차 희망의 버스 홍보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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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85호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씀

20110213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엄마,혹시 나 보여?
보여도 보지마.
엄마 못보고 산지가 30년이 넘었네.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나이더라구. 엄마 가버린 나이.나 스무살 때.
그땐 왜 그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나몰라.쉰둘인데.쉰둘일뿐인데..그냥 엄마 많이 아프니까,아부지 뵈기싫어 죽겠는데 자꾸 집에와서 있으라하니까,
졸려 죽겠는데 새벽기도 가라 하니까,복수찬 데 돌미나리가 좋다고 한겨울에 그거 뜯어오라 그러니까,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이니까,갈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적,
솔직히 많았어.그게 젤 걸리고.
엄마 임종 못본거 다행이라고 생각해.새끼들은 죄다 이기적이니까.
이왕 안볼거면 염하는것도 안봐야했는데 그지같은 외삼촌이 억지로 끌고가서 봐 버렸네.
복어처럼 땡땡해선 시퍼런 심줄이 미나리처럼 돋아났던 배가 시커멓게 푹 꺼졌더라구.
난 그게 다 아부지때문이라고 생각했어.엄마뱃속으로 낳지도 않은 언니들 키우면서 쌓인 스트레스거나.
엄마속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게 나때문이란 생각 끝까지 안하려 했지.
엄마.엄마두 그거 알았어?엄마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는 걸 내가 참 좋아한 거.평생 40kg이 안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우리엄마.
그냥 그렇게 달려서 도망가고 싶었다.어디든.
그걸 할수없었던 나는 번번이 엇나가 홀로 탄 자전거를 하염없이 굴려 갈수없는 길까지 가곤했다.
열다섯살 때.꽤 멀리 갔었다.
안돌아가려 했으니까.
근데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내가 자전거 안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산을 내려와 긴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노을 서럽던 저녁.
장날이었던가봐.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던 먼지나던 신작로.
집언저리쯤에서 눈으로 엄마를 찾는데 엄마보다 먼저본 게 저만치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주황색 나이롱 바가지였어.흩어지던 콩나물.콩나물위에 떨어지던 눈물.
부산와서 첫월급.그 눈물나는 돈을받아 엄마 쉐타사고 법랑냄비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다.
엄마 유품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냄비는 선반위에서 박스채로,중학교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쓰고 죽었냐
이누무 이상한 엄마야.
정신 놓았다가도 진수,진수 부르며 눈을 뜨려 기를쓰던 진수도 갔다.
진수는 니가 좀 거둬줘라.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새낄 어떻게 거두냐.
엄마찾아 갔으니까 엄마가 거둬.
첫징역 살때 큰언니가 면회를 왔더라.
외포리에서 그 먼길을 오면서 멀미를 으찌 했는지 입술까지 하얘.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허리펴고 서있지도 못하고 면회시간이 끝났는데 가면서 그러대.
"그르니 엄마가 일찍 죽길 을마나 다행이냐"..그런 말은 박혀.잘 빠지지도 않고.
그러고보니 살면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보다 엄마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날이 더 많았네.
근데두 엄마.보고싶을 때가 있어.한번만,잠깐만이라도,안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어..

-어버이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고공농성 12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자 27년 해고자, 한진 조합원, 김진숙 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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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9 - 한진중공업

20110318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고공농성 72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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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8 - 한진중공업


20110318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문철상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장과 채길용 한진중공업지회장의 고공농성 29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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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2 - 한진중공업지회

20110213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아래. 그 대차던 노동자 오대일의 눈물.

김진숙 지도위원 14번째 편지글(크레인 고공농성 39일차)

대일아, 한 번도 본적도 없고 얘기를 나눠 보지도 않았지만 얼마 전 촛불집회 때 써 보낸 편지에 나를 누나라고 불러줬으니 편하게 동생이라고 부르마.
내가 해고되지 않았고 너 또한 해고되지 않으면 우린 조립팀에서 김주익 지회장과 함께 이용대 대의원 같은 분들과 조립팀 동료로, 선후배로 평화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해고됐고 너는 해고를 앞두고 있고 김주익 지회장은 죽었다.
노동자에게 해고란 해고될 당시에만 상처받고 아픈 게 아니라 평생을 따라다니는 낙인이고 아물지 않는 상처다.
더군다나 함께 민주노조를 세우겠다고 매일 저녁 만나서 회의하고 토론하고 유인물을 뿌리고 짓밟히고 두들겨 맞아가며 투쟁을 함께했던 박창수 위원원장을 잃고 나는 평생을 죄인으로 살았다.
나 때문에 박창수 위원장이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공분실에서 그 치욕을 겪으면서도 징역살이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나는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너에겐 일곱 살 짜리 딸과 세 살짜리 아들이 있다고 했느냐.
박창수 위원장에겐 여섯 살 짜리 아들과 세 살 짜리 딸이 있었다.
그가 죽고 20년 세월이 넘도록 용찬이가 어떻게 컸는지, 예란이가 몇 학년인지, 그 부인이 어떻게 사는지 한 번도 마음 편히 안부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위원장에 당선되던 날 나는 감옥에 있었고,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땐 그가 감옥에 있었다. 그가 징역에서 출감도 못한 죄수의 신분으로 죽었을 때 나는 수배 중이었다.

몇 달 더 고생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사람이 너울너울 만장 앞세우고 동지들의 어깨에 멘 관에 담겨 영도다리를 넘어 오던 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우는 거밖엔 없었다. 내가 울고 있을 때 아저씨들은 화염병을 들었다.
대일이 네가 선배, 형님이라고 부르는 아저씨들이 안기부에 화염병을 던지며 몇 달을 싸워 지켜낸 생존권이고 노동조합이다.

형님들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고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그 이후로도 동지들의 죽음을 차례차례 묻으며 형님들은 여기까지 왔다. 이젠 너희들이 형님들을 지켜 줄 차례다.
여기서 더 이상 밀리면 안 되지 않겠느냐. 더 이상 빼앗기면 안 되는 거 아니겠느냐.
한 인간의 탐욕을 위해 수백 명이 죽을 순 없는 거 아니냐.
생각만 해도 목이 메이는 우리 새끼들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

울산에서 내쫒기고 그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너를 또 쫒아내겠다는 회사.
설사 이번에 빠진다 하더라도 자본은 더 큰 아픔으로 우리를 짤라 정규직의 씨를 말릴 것이다.
네 동생에게 해고통보서를 보낸 한진 자본.
본가에까지 해고통보서를 보내 부모님들한테 까지 충격을 준 저 짐승만도 못한 놈들과 싸워 꼭 이겨야 하지 않겠느냐.
꼭 이겨서 미칠 듯이 보고 싶은 아이들한테로, 사랑하는 마누라한테로 환하게 웃으며 돌아가자.
네가 형님들을 믿고, 형님들이 동생들을 믿어 준다면 우린 오대일로 이길 수 있다.

한진중공업의 모든 오대일들, 투쟁!

2011년 2월 13일
크레인 고공농성 39일차 저녁촛불문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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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지도위원 김주익 열사 추모사



김주익 열사 추모사

작년에 한진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년 일해 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잔 들어가자 박창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습니다.

50년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무겁고 아픕니다.

 두 번쨉니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 명의 위원장 중 두명은 구속 뒤에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쫒겨 다니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 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 가고 죽어 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뭘 그렇게 죽을 죄를 졌습니까? 조양호 회장님, 조남호 부회장님,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이 소름 끼치는 살인 게임이 앞으로 몇 판이 더 남았습니까?

 LNG 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 변호사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 낸 권력의 맛이 그렇게 달콤합디까? 조중동 그 찌라시들의 꼬붕 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했습니까?

21년 된 노동자의 임금이 105만 원. 세금 때면 80만 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 원. 129일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늙은 노동자가 88일 애원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누구 하나 코빼기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꽁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서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 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체감온도 영하 수십도 한겨울에도 고양이 세수해 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그냥 살 걸 그랬습니다. 변소에 버글거리던 구더기들 처럼 그냥 그렇개 살 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 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 걸 그랬나 봅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 원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 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가, 김주익이가, 그 천금 같은 삶들이,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올 수 있다면, 그 단단한 어깨를, 그 순박하 웃음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 있다면, 용찬이 예란이에게, 준엽이, 혜민이, 준하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착하고, 어쩌자고 그렇게 우직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 조강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 책봉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재계 순위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사장님이 재계 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한 달 수천만 원을 써도 재산이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 한 달 100만 원을 벌겠다고 수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 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 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데, 2년치 임금 7만 5,000원을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올라 간 그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서 맞서다 직장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 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 원 주던 노동자 잘라 내면 70만 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이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려들다가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또 알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 압착으로 두부 협착으로 죽어 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 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 도시 대구, 전자 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들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 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쉰이 넘은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참으로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섭습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이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 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꺼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연젠가는 갚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고스란히 되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 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 보며 일자리 구해 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3년 10월 22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노동탄압 규탄 전국대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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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71 - 한진중공업지회

20110213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나이 29에 정리해고란 통보서를 받으니 날개가 꺽인 기분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생긴다지만 너무 빨리 왔네요. 하하하.
하지만 겁은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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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85호 지브 크레인 중간, 이용대 한진중공업지회 대의원

20110110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이용대 대의원은 김진숙 지도위원과 같은 파트 동료였다. 벌써 이십 수 년 전 이야기다. 그 동료를 위해 85호 지브 크레인 중간에서 그를 지키고 있다. 그가 김주익 전 지회장처럼 죽어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살아서 걸어내려올 수 있도록 지키고 있다. 밥을 올려주고 고구마를 올려주고 소식을 올려주고 있다. 1월 6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른 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김 지도위원이 잠에 들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킨다. "내만 찾아싼다"라고 불평하지만, 금새 "여기 있는 게 내 맘이 편하다"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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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20110110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1월 6일 새벽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85호 지브 크레인에 올랐다. 2003년 김주익 당시 한진중공업지회장이 구조조정 중단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129일 동안 농성하다 목을 매고 자결한 장소다.  1월 12일 한진중공업 사측은 290명 정리해고 명단을 부산지방고용노동청에 신청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남긴 글]

1월 3일 아침, 침낭도 아니고 이불을 들고 출근하시는 아저씨를 봤습니다.
새해 첫 출근날 노숙농성을 해야 하는 아저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겨울 시청광장 찬바닥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가장에게 이불보따리를 싸줬던
마누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살고 싶은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고 싶은 겁니다.
지난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한 이후 한진에선 3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짤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 당했습니다.
명퇴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400명을 또 짜르겠답니다. 하청까지 천 명이 넘게 짤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 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그 파리목숨들을 안주삼아 회장님과 아드님은 배당금 176억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정리해고 발표 다음 날.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물 한 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 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 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짤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조합원들 운명이 뻔한데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한진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겁니다.
쌍용차는 옥쇄파업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니라 명단이 발표되고 난 이후
산자 죽은자로 갈라져 투쟁이 힘들어진 겁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려웠는데 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 씨는..  재규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이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                        
                                                                            --- 김진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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