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2012,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강신준 - 『자본』 번역자 ·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저자 ·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한 역사적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감된 시대에 묻혀 마르크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회체제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 거대담론은 한낱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거시적인 사회체제 대신 미시적인 개인의 일상이 문제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문을 열었다. 소위 포스트모던의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죽은 자가 산 자를 내쫓는” 마르크스의 잠언이 마르크스 자신에게서 실현될 줄이야. 2008년 세계공황이 발발하면서 포스트모던의 바람은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시적 미풍에 불과한 것인지를 앙상하게 드러내었다.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벌써 3년을 넘기고 있는 공황은 미시적 일상의 분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체제 그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묘비명 뒤로 사라졌던 마르크스는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왔다. 공황을 일으킨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에 대한 분석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마르크스에게서만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부활하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강의에 수강생들이 다시 몰려들고 그의 책은 판매가 급증하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해롤드 제임스의 선언대로 “마르크스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만은 여기에서 예외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엉뚱하게도 마르크스 대신 케인스가, 체제 변혁의 변증법 대신 윤리적인 정의가 사회적 이목을 끌고 있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한국에는 부활할 마르크스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마르크스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87년 『자본』의 번역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곧이어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현실 사회주의가 와해되었다. 곧바로 포스트모던의 바람이 수입되었고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바람은 채 불기도 전에 잦아들고 말았다. 학계는 물론이고 노동운동, 사회운동 어디에도 마르크스는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아니 한 번도 자리를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공황의 발발과 함께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마르크스의 바람이 한국에서는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공황과 함께 사회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에 대한 변화의 갈망은 터져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대안의 희망은 한국 사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촛불집회가, 용산참사가, 쌍용자동차가, 그리고 희망버스가 모두 참혹한 모순에 대한 변화의 갈망을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대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가 고민하던 1848년 유럽의 상태를 그대로 닮아 있다. 변화의 갈망은 혁명에 담겼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과학적 지렛대가 그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위업은 바로 이 과학적 지렛대를 직접 제시했다는 점에 있고 그가 지난 천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절망이 어두운 까닭은 바로 이 과학적 지렛대, 마르크스의 부재 때문이다. 그래서 2012년 지금 한국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를 얘기해야 한다. 그것도 진지하게 얘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리고 그것만이 오늘 한국사회의 참혹한 절망에 희망의 빛을 열어줄 수 있는 과학적 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실린 사진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리고 있다. 바로 지금 한국이 마르크스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시대를 맞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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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소통의 작업: 신자유주의 거리를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기록과 소통의 작업: 신자유주의 거리를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광석 - 사이방가르드저자 · 평론가 ·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사진은 기록의 매체라 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란 괴물이 삼켜버린 대한민국에서 사진은 어떠해야 하는가? 권력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꼼수’들이 판치는 현실에서 사진은 그 피울음과 허상을 담아야 한다. 커다랗게 멍들고 좌절에 신음하며 미래를 상실한 이들의 모습을 기록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리를 배회한다면 그 질곡의 현실을 『자본』 부록으로 재집필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사회과학자들이 해야 할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불러들이는 일에 사진작가들이 나섰다. 우리의 생채기 난 현실을 기록하는데, 르포 사진가인 이상엽, 포토저널리스트 정택용,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현린과 홍진훤이 뭉쳤다. 이상엽은 4대강과 도시 재개발의 폭력성을, 정택용은 오랜 기간 기륭전자와 쌍용차 노동자의 힘겨운 싸움을, 현린은 평택 미군기지와 촛불집회를, 홍진훤은 용산참사의 현장을 사진 속에 담아왔다. 이들 네 명은 사진계에서 이미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들이는 주술사들로 통한다. 힘없는 이들의 한복판에서 사진을 통해 리얼리즘의 미학적 실천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번 「TAKE LEFT」는 바로 이들 주술사들이 벌이는 마르크스를 귀환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사진의 기록은 감흥과 소통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TAKE LEFT」는 기록을 나누고 공유하는 미학적 작업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들 넷의 전위적 작업들이 전시의 중심 테마이지만, 직업적 사진작가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기록의 작업에 함께 참여하고 감흥의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새로운 사진의 소통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술사들은 네이버, 페이스북, 플리커, 트위터 등에 누리꾼들의 공동작업을 위한 소통의 공간을 마련했다. 누리꾼들의 참여도에 따라 ‘빨간책’ 증정이란 유인 아닌 유인책을 통해 누리꾼들의 사진 공모를 몇 차례 걸쳐 진행했다. 또한 공유나 펌, 사진 전시에 관한 설문 공모들을 통해 이들은 자신을 닮은 더 많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만들어낸다.

 
한국 사회를 집어삼킨 신자유주의란 괴물에 맞서 오늘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벌이는 투쟁은 새롭고 신선하다. 전시기획 「TAKE LEFT」가 취했던 대중 소통의 방식은 이 점에서 특별하다. 먼저 최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전시기획의 프로모션과 누리꾼 참여를 이끌었다. 들불과 같이 퍼지는 소셜미디어 내 정보 파급력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되살리는 작업에 효과적이었다. 둘째, 단순히 전시공간을 통한 보여주기가 아닌 전문작가와 일반인의 공동작업과 해우를 통한 마르크스의 유령 복원이 이뤄진다. 전시 기획의 제안은 전문 사진작가들에 의해 이뤄지나, 나머지 작품들은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공모작을 통해 충원되었다. 산개한 아마추어리즘과 이의 문제의식을 전문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만나는 중요한 장으로 전시기획을 활용한다. 셋째, 대중과 전문 사진작가들이 함께 마르크스의 유령에 대한 사진 아카이브 즉 기록 작업을 수행하며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장으로써 그 기획의 참신성이 엿보인다.

 
카메라를 메고 나타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우리는 전문작가와 누리꾼을 연결하는 기록과 소통의 네트워크를 볼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피폐화된 서울과 대한민국 거리 곳곳을 볼 수 있다. 「TAKE LEFT」를 통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현한 이유는 단순히 사진을 통해 기록과 소통의 미학 작업을 추구하는 것에 국한되진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번 전시기획의 의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로부터 정념을 받아 지배의 전략을 벗어난 저 다른 곳, 이상향을 공유하는 저항과 연대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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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카메라 메고 서울에 오다, TAKE LEFT



TAKE LEFT




마르크스, 카메라 메고 서울에 오다

이상엽, 정택용, 현 린, 홍진훤/갤러리 나우/2012년 1월 25일~31일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두고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완성을 선언한 후 다음 해, 자크 데리다는 자본주의로 인한 착취와 빈곤이 남아 있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들Les spectres de Marx” 은 언제든 다시 귀환한다고 반박한다. 이때 데리다는 햄릿을 인용하는데,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원혼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지만 동시에 햄릿은 그런 자신의 상황을 두고 이렇게 탄식한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아, 저주스런 낭패로다. 그걸 바로 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The time is out of joint. O cursed spite. That ever I was born to set it right.” 아직 끝이 아니라고 반박은 했지만 데리다에게도 그 시절의 “지금maintenant” 죽은 마르크스의 명령을 “지키기maintenant”로 맹세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고 저주와도 같았던 것.

그 로부터 20년 후 ‘지금’,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자본주의의 메카 뉴욕 월스트리트가 붕괴되었고, 유럽 전체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지금’ ‘지키기’ 위해 맹세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이고, “그걸 바로 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탄식하는 자도 자본주의자들이다. 심지어 국유화라는 공산주의적 결단까지 서슴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크스의 유령이 귀환한 것일까? 어긋나 있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은 것일까? 아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겠다고 거리로 나온 이들이 증언하듯, 정작 그 국유화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다시 자본가들이라는 점에서 이 유령spectre은 다만 환영spectacle이다. 하지만 어떤가? 정말 마르크스의 유령이 귀환한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유령과 환영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르크스의 유령을 초대하기로 했다. 1999년 이미 뉴욕을 다녀갔으니, 이번이 최초의 귀환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아니라 하워드 진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Marx in Soho] 을 통해 무대에 올랐던 것. 그때 그는 자신을 맹신하는 자들에게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충고했지만, 10년 후 뉴욕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들 아는 대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 2012년 서울이라고 해서 안 될 것 없다. 다만 이번엔 연극이 아니라 사진이다. 하지만 그의 심령사진을 찍어 전시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번엔 색다른 여행 조건을 제시했다. 서울에는 사진가로서 방문해 달라는 것. 좌파의 지주 마르크스의 유령spectre은 환영spectacle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지금’ 무엇을 보았고 ‘지키기’ 원하는지 보여 달라는 것. 이른바 ‘TAKE LEFT’ 프로젝트.

이 번 마르크스의 귀환 여행에는 좌파로 찍히고 좌파로 찍기를 마다 않는 이상엽, 정택용, 현린, 홍진훤 등 네 명의 사진가가 동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귀한 여행을 네 명만 독점할 수는 없는 노릇. 좌파를 잡기 위해서건 좌파로 찍기 위해서건 동행을 원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네이버, 페이스북, 플릭커, 트위터 등에 TAKE LEFT 공간을 마련한다. 이 가상공간의 문이 열리는 때는 2011년 12월 25일, 예수가 태어났다는 날. 21세기 이 땅을 방문한 마르크스라면 주목하리라 싶은 사건을 사진에 담아 올리면 선별 과정을 거쳐 현실공간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전시는 2012년 1월 25일부터 1월 31일까지 갤러리 나우에서 진행된다. 전시기간 중에는 마르크스의 유령이 선정한 사진들을 두고 토론회 TALK LEFT도 열린다. (문의. 02-725-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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