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3일 해남군 옥천면 송운리 출생
1952년 옥천초등학교 졸업
1955년 해남중학교 졸업
1958년 목포공업고등학교 졸업
1966년 12월 최해옥 여사와 결혼
1970년 해남 YMCA 신협 설립 발기인/해남읍 교회 신협 설립 발기인/해남읍교회 중고등부 교사
1972년 해남 YMCA 농어촌 위원장
1977년 故 김남주, 황석영 등과 농민운동 조직화에 나섬
1978년 전남기독교 농민회 총무
1980년 5.18당시 전남기독교농민회 총무로 무안, 해남, 영암, 강진 시위주도
1981년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교육부장
1982년 해남 기독교 농민회 면 협의회 건설 주도
1984년 민중교육연구소 교육부장, 미국농산물 수입 저지 미국대사관 점거 투쟁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부의장/전국수세대책위 교육 선전활동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초대의장
199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
1992년 농민대회 주도 수배 중 구속, 4년간 수감생활(1996년 만기 출소)
1998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의장
1999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200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의장
2002년 전국농민대회 관련 투옥
2003년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WTO 칸쿤회의 반대 한국투쟁단 대표
2005년 APEC반대 국민행동 대표/WTO 반대 홍콩민중투쟁단 대표/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사망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6년 한미FTA저지 미국원정투쟁단 단장/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2007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2007년 한미FTA저지 투쟁관련 3차 투옥
2009년 한국진보연대 고문
2010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11년 민주노동당 고문/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전농 2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2011년 4월 26일 4.27 화순군수 보궐선거 지원유세 후 해남으로 이동 중 교통사고
2011년 5월 13일 오후 8시 51분 조선대학교 병원에서 운명
故 정광훈 민주노동당 고문의 삶과 발자취
“혁명은 모지리가 하는 것이어라우” 변혁에 대한 열정과 혁명적 낙관 넘친 ‘민중의 벗’
故 정광훈 민주노동당 고문의 73년 생애는 이 땅의 ‘혁명가’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삶이었다. ‘운동 1세대’로서 지역 농민회를 세우고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역임하며 농민운동을 일궜던 정 고문은 2000년대에 들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의장,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를 맡으며 전선운동을 이끌었다.
해남 ‘골드핑거’, 농민운동에 뛰어들다
정 고문은 1939년 9월13일 전남 해남군 옥천면 송운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부 욕심도 많아 옥천초등학교, 해남중학교를 거쳐 목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타고난 기술인이었다. 군 제대 뒤 69년 해남읍으로 나가 전파상을 차렸는데 손재주가 뛰어나 드라이버 하나만 있으면 못 고치는 전자제품이 없었다. 그래서 해남읍에선 ‘정광훈’하면 ‘골드핑거’, ‘마이다스’로 통했다. 읍내에서 내로라하는 유지들도 정 고문의 손을 빌려 전자제품을 고치고 싶어 해 그의 전파상엔 일감이 늘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 시절 그가 TV난시청 지역을 해소하기 위해 해남 금강산 꼭대기에 무인중계소를 설치했다가 전파관리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사회운동을 안 하고 전파상 일만 했으면 해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부자가 됐을” 정 고문이었지만 막상 자신은 돈 버는 데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빈곤하고 억압받는 농민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그는 1970년 해남YMCA 농어촌위원장 등을 맡으며 농민 권익을 위한 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 광주에서 활동하다 고향에 내려온 김남주 시인을 만나 농촌문제의 구조적 모순에 눈뜬 정 고문은 1977년 김남주, 황석영 등과 함께 해남농민회 결성을 시작으로 농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명숙 전 총리가 간사로 있던 크리스천아카데미 활동에 참여한 것도 이 즈음이다.
김남주 시인의 동생이자 정 고문과 함께 농민운동을 일궈온 김덕종 전 전농 광주전남연맹 의장은 “70년대 말, 80년대 초를 농민운동의 태동기라고 하는데 광훈이 형은 당시 수많은 농민운동가 양성에 앞장섰다”며 “전국의 시골을 찾아다니며 농사일이 끝난 밤이나 농한기에 농민들을 모아 밤새 학습하고 토론하는 등 교육, 조직, 투쟁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결성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87~89년 수세투쟁의 승리도 이같이 아래로부터 농민운동가를 양성하고 조직했던 정 고문의 활동이 밑거름이 됐다.
1990년 전농 광주전남연맹 초대 의장이던 그는 그해 9월7일 열린 ‘UR반대 농민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돼 이태 뒤인 92년 5월 구속, 무려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정 고문은 특유의 낙천적 성격으로 수감생활을 ‘즐겼다.’ 그는 수감생활에 대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던 시기”로 기억했다.
수감생활 중 『자본론』 등 독파한 독서광
평소 왕성한 독서량을 자랑했던 정 고문은 어딜 가나 배낭 한쪽에 책을 넣고 다녔다. 광주교도소 4년 수감생활 동안 그는 『자본론』을 모두 읽었고 『두만강』, 『태백산맥』, 『토지』같은 소설책도 섭렵했다. 푼돈이라도 생길 때면 늘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고, 지인들이나 후배 활동가들에게도 책을 선물하며 다독(多讀)할 것을 권유했다. 특히 평소 ‘약탈적 세계화’를 정면으로 비판해왔던 정 고문은 자본주의, 세계화의 본질을 보여주는 책읽기를 좋아해 『세계화에서 살아남기』란 책은 500권이나 구입해 각 지역 교도소나 지인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살아생전 집회에서 들려주던 친근하고 통속적이면서도 촌철살인의 명쾌한 연설 또한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사색, 그리고 민중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 고문은 ‘청빈’과 ‘무소유’ 원칙을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 고문 자신도 “나는 삼무(三無)다. 집 없고, 돈 없고, 땅이 없다”고 말했듯 지인들은 “평생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며 “‘무소유’ 운동가의 생활을 철저히 지키셨다”고 전했다. 평소 “혁명가는 ‘고정자산’의 비율이 높으면 안 된다”며 “지킬 게 없어야 모든 걸 내놓고 싸울 수 있다”고 강조했던 정 고문은 객지 생활을 할 땐 주로 농민회 사무실 등에서 지냈고, 간혹 주례비나 강연비가 생겨도 책을 사거나 후배 활동가들에게 다 나눠줬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식당 등에서 고장 난 전자제품 등을 고쳐주고 한 끼 식사를 때우면서 전국팔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니 가정형편은 늘 어려웠다. 해남중학교 동창인 최해옥 여사와 사이에서 2남1녀를 둔 정 고문은 “혁명을 하기 위해선 ‘가족주의’를 배제해야 한다”면서도 가슴 한구석엔 늘 가족에 미안한 마음을 지녔다. 박웅두 전 전농 정책위원장은 “최 여사를 ‘사랑하는 우리 해옥 씨’라고 부르며 여사의 노고에 항상 고마워했다”고 떠올렸다.
정 고문은 노동자, 농민, 빈민, 중소상인 등 모든 계급계층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든든한 ‘멘토’였는데, 특히 공무원노조에 큰 관심을 쏟았다. 2001년 공무원노조 출범 당시 공무원노조 전남본부장이었던 민점기 광주전남진보연대 상임대표는 “공무원노조의 숱한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항상 함께해주시면서 기를 불어넣어주신 분”이라고 기억했다. 민 상임대표는 “현대사 속에서 정부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공무원들이 어느 날 노조를 만들더니 공직사회를 개혁하겠다니까 당신 보시기에 기특하기 짝이 없는 거다. 권력 내부 핵심부대인 공무원들이 변혁적으로 된다는 건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공무원노조를 보호하고 도와줘야한다는 사명감이 남다르셨다”고 전했다.
‘혁명의 축제에 초대합니다’와 민중학교
정 고문은 지난해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선 책 집필과 ‘민중학교’ 짓는 일에 매진했다. ‘혁명의 축제에 초대합니다’란 가제가 붙은 이 책은 농민운동 활동가들에 보내는 편지형식의 글을 모은 것으로, 정 고문은 최근 석 달 간 편지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정 고문이 기거하던 초가집 옆엔 민중학교를 지었다. 30평 정도의 터에 2층으로 지은 민중학교는 현재 8할 정도가 완성된 상태다. 정 고문은 민중학교가 활동가들이 찾아와 책도 읽고 토론도 하며 변혁운동의 꿈을 키우는 곳이 되길 바랐다.
‘청년 정광훈.’ 정 고문을 아는 이들은 칠십이 넘은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평생을 민중에 대한 사랑, 변혁에 대한 열정, 혁명적 낙관,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민중의 벗’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고향에 돌아온 정 고문과 함께 살았던 김종수 씨는 “하늘에 계신 고문님께선 당신의 죽음조차 ‘혁명의 축제’처럼 즐기길 원하셨을 것”이라며 “아마 ‘내가 손 없는 날 받아놨으니까 모여서 제대로 놀아들 봐. 슬퍼하지 말고 축제처럼 즐겨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당신의 죽음을 계기로 진보진영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길 원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혁명은 모지리가 하는 것”이라며 민중을 혁명의 주인 주체로 내세웠고 “혁명은 뜬금없이 찾아온다”며 활동가들에게 신념을 가지고 ‘그날’을 준비하자고 역설해 온 정 고문은 17일 오후 농민운동을 함께했던 혁명동지 고 김남주 시인 곁에 영원히 잠들었다.
고정희(1948~1991) 시인을 알게 된 시기가 분명히 기억나는 건 1991년 6월 그가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했다는 뉴스에서였다.
그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기억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수학선생님이 언급해서 또렷해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대학 때까지 꾸준히 그의 글을 만났다.
99년 제대하고 학교를 어슬렁거리다가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이 실린 시집을 찾던 중 『지리산의 봄』을 구했다.
끈끈한 생명력을 느낀다.
엎어지고 깨지고 질곡 속에 빠져들어가는 삶 속에서도 서서히 일어서는 긍정적인 힘을 느낀다.
그가 이미 세상을 떠서일까.
밝지는 않다.
약간 처연한 감도 있지만 어쨌든 땅과 흙, 어머니를 느끼게 한다.
시인의 사후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됐다는 시 <독신자>.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본 것처럼 묘사한 그 시 이야기는 참 처연해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 『지리산의 봄』, 自序 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