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보라>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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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104 - 한진중공업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20111110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아래. 309일의 크레인 농성을 마치고 약속대로 살아서, 걸어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익 씨도 이렇게 걸어 내려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309일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한 이름이 김주익, 곽재규였습니다.
4도크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309일을 어떻게 버텼냐고 얘길 하지만,
그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시간들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동지 여러분, 이제 해고자, 비해고자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100프로 물론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저나 여러분들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의 이 시간들로 먼저 간 동지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투쟁 기간에 서로간에 앙금이 있었다면 그것도 깨끗이 씻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 출발입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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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98 - 김진숙 지도위원

20110820-21 서울광장. 8.20 희망시국대회.

전화통화 내용

고맙습니다, 여러분. 김진숙이 이렇게 많은데 조남호는 하나도 안 보이는군요. 우리 조합원들이 김진숙이고, 여러분들이 김진숙이고, 희망버스를 타시는 분들이 김진숙이고, 정리해고에 반대하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분들이 김진숙입니다.

85호 크레인은 서울에도 있고 인천, 수원, 광주, 전주, 울산, 충청도, 강원도, 그리고 제주에도 있습니다. 희망버스가 오기 전까지 한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았습니까? 희망버스가 없었다면 청문회가 열리지도 않았고 조남호가 영구 닮은 걸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희망버스는 절망 속에 갇혀 있던 우리 조합원들에게 기꺼이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향해 내밀었던 그 손은 참 따뜻했습니다. 그 손은 생명의 손이었고 평화의 손이었습니다.

쓰러진 이를 한 번도 일으켜보지 않은 자들이 어찌 이 손의 따뜻함을 알겠습니까. 우는 사람의 눈물을 한 번도 닦아 준 적이 없는 자들이 어찌 연대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정리해고가 어떤 건지, 해고된 이후로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저들은 모릅니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정리해고 철회해 달라고, 일곱 살짜리 아이가 조남호 아저씨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편지를 쓰는 나라에 우리가 삽니다. 같은 사원아파트에서 태어나 같이 자라고 같은 학교를 다니지만 아빠가 산 자, 죽은 자로 나뉘면서 친구마저 잃은 아이들입니다.

검은 옷 입은 용역들에게 아빠가 끌려나오는 걸 본 이후 검은 옷 입은 사람만 보면 운다는 아이들입니다. 가족들을 그려보라니까 아빠가 없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 아빠랑 같이 목욕가는 거라는 저 아이들. 목이 마르면 정수기로 가는 게 아니라 화장실 수도꼭지 물을 받아먹는 저 아이들. 이 슬픈 현실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합니까.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던 저 아이의 엄마들이 얼마나 더 울어야 합니까.

길에서 울고 집에서 울던 저 아이들이 급식 때문에 학교에서마저 울어야 하는 차별의 대물림은 끝내야 합니다. 생목숨을 죽여 놓고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를 모른다는 저들의 뻔뻔함을 끝내야 합니다. 심호흡을 하면서 뜸을 들이고 최대한 어눌하게 말하라는 각본에 따라 ‘영구 없다’ 놀이를 하는 저들의 가면을 이제는 벗겨야 합니다. 그 영구만들기 프로젝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인내력과의 싸움이다. 시종일관 똑같은 말을 시종일관 어눌하게.’ 과연 인내의 대마왕이십니다.

저 사람 잡는 인내를 꺾으려면 4차 희망버스는 더 커져야 합니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합니다. 크레인 중간지점 사수대 신동순 동지가 오늘로 단식 6일쨉니다. 오늘까지 단식을 만류하느라 조합원들에게도 알리지를 못했는데 결국 신 동지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리해고 철회는 물론 용역들이 밥그릇까지 열어보고 금속탐지기를 들고 생필품마저 금지하는 비인간적인 처우와 이 크레인을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에 온몸으로 맞서는 단식입니다.

희망버스 기획단과 승객 여러분들의 뜨거운 열정과 변함없는 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저는 설날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우리 사수대 동지들 추석만큼은 가족들과 보내게 해주십시오. 4차 희망버스가 그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십시오. 희망버스가 승리의 버스가 되는 그날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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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님의 2차 희망의 버스 홍보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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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죽음들, 나에겐 고스란히 빚입니다


20110514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아래.

7회 ‘박종철인권상’을 수여하게 된 수상소감

시퍼런 청년을 열사로 부르는 일이 나는 아직도 낯설다. ‘인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박종철이 대공분실에서 죽어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내가 거기 다녀온 지 몇 달 후였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내가 다녀온 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었는지 내가 겪은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었는지 비로소 실감났다.

그는 죽고, 그와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살아서 크레인에 오른 지 152일째. 선배의 이름을 불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시대. 죽음으로 역사가 된 청년의 이름을 우리는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 부름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고 전국 곳곳에서 하루 저녁에도 수 백 개의 노동조합이 세워지고 어용노조가 민주노조로 바뀌었다.

불량 냈다고 따귀 맞고 5분 지각했다고 하루 일당이 까이던, 손가락이 잘리고 다리가 부러져도, 심지어 사람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순이 공돌이들이 노동자라는 본명을 쟁취했던 개명천지.

이 크레인에서 보는 바로 맞은편에 그의 집이 있었다. 선배와의 약속을 목숨처럼 여겼던 한 청년이 죽었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이 크레인에선 조합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끼들과의 약속을 어겼던 한 노동자가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들이 고스란히 빚이 된 내가 다시 크레인에 올라 그의 집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본다.

역사는 아직도 이렇게 가혹하다. 인연이 빚이 되고 죄가 되는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 몫의 밭을 갈 뿐이다. 그렇게 돌을 골라내고 바위를 들어내며 황무지를 갈다보면 꽃도 되고 감자도 열고 고구마도 캘 날이 오려니 하는 믿음으로.

25년 전 한 청년이 쓰고자 했던 민주주의를 온 몸으로 써내려가는 우리조합원들에게 이 상이 위로가 되길 바라며 곳곳에서 싸우는 노동자, 청년학생들, 민중들의 하루하루가 박종철이 살고 싶었던 세상으로 이어지는 나날임을 되새기고자 한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2011년 6월 6일
크레인고공농성 152차 김진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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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088 - 한진중공업지회

20110515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지브크레인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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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버스를 타러 가요

희망의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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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 오늘이 129일째 2003년도와 똑 같다


오늘이 129일,

2003년 김주익 지회장이
이 85호 크레인에 매달려 있던
마지막 날이다.

그때도 구조조정이라는 살인행위가 있었고
거기에 저항해 우리는 2년을 싸웠다.

2년 만에 약속한 노사합의는
쓰레기처럼 버려졌고
그날밤,
김주익 지회장이 이 크레인에 올랐다.

그는 끝내 이 크레인 위에서 목을 맸고
2주일 후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또 죽었다.

그리고 8년
회사는 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빼들었고,
1700억 원의 영업이익이 났고,
경영진들은 수백억의 주식배당금을 챙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라는 게
해고사유였다.

그리고 나는
지난 1월 6일 이 크레인에 올랐고
오늘이 129일째,
상황은 2003년도와 똑 같다.


제작 : 문화미디어행동
내레이션 : 85호 크레인 농성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상영시간 : 03분 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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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85호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씀

20110213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엄마,혹시 나 보여?
보여도 보지마.
엄마 못보고 산지가 30년이 넘었네.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나이더라구. 엄마 가버린 나이.나 스무살 때.
그땐 왜 그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나몰라.쉰둘인데.쉰둘일뿐인데..그냥 엄마 많이 아프니까,아부지 뵈기싫어 죽겠는데 자꾸 집에와서 있으라하니까,
졸려 죽겠는데 새벽기도 가라 하니까,복수찬 데 돌미나리가 좋다고 한겨울에 그거 뜯어오라 그러니까,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이니까,갈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적,
솔직히 많았어.그게 젤 걸리고.
엄마 임종 못본거 다행이라고 생각해.새끼들은 죄다 이기적이니까.
이왕 안볼거면 염하는것도 안봐야했는데 그지같은 외삼촌이 억지로 끌고가서 봐 버렸네.
복어처럼 땡땡해선 시퍼런 심줄이 미나리처럼 돋아났던 배가 시커멓게 푹 꺼졌더라구.
난 그게 다 아부지때문이라고 생각했어.엄마뱃속으로 낳지도 않은 언니들 키우면서 쌓인 스트레스거나.
엄마속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게 나때문이란 생각 끝까지 안하려 했지.
엄마.엄마두 그거 알았어?엄마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는 걸 내가 참 좋아한 거.평생 40kg이 안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우리엄마.
그냥 그렇게 달려서 도망가고 싶었다.어디든.
그걸 할수없었던 나는 번번이 엇나가 홀로 탄 자전거를 하염없이 굴려 갈수없는 길까지 가곤했다.
열다섯살 때.꽤 멀리 갔었다.
안돌아가려 했으니까.
근데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내가 자전거 안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산을 내려와 긴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노을 서럽던 저녁.
장날이었던가봐.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던 먼지나던 신작로.
집언저리쯤에서 눈으로 엄마를 찾는데 엄마보다 먼저본 게 저만치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주황색 나이롱 바가지였어.흩어지던 콩나물.콩나물위에 떨어지던 눈물.
부산와서 첫월급.그 눈물나는 돈을받아 엄마 쉐타사고 법랑냄비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다.
엄마 유품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냄비는 선반위에서 박스채로,중학교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쓰고 죽었냐
이누무 이상한 엄마야.
정신 놓았다가도 진수,진수 부르며 눈을 뜨려 기를쓰던 진수도 갔다.
진수는 니가 좀 거둬줘라.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새낄 어떻게 거두냐.
엄마찾아 갔으니까 엄마가 거둬.
첫징역 살때 큰언니가 면회를 왔더라.
외포리에서 그 먼길을 오면서 멀미를 으찌 했는지 입술까지 하얘.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허리펴고 서있지도 못하고 면회시간이 끝났는데 가면서 그러대.
"그르니 엄마가 일찍 죽길 을마나 다행이냐"..그런 말은 박혀.잘 빠지지도 않고.
그러고보니 살면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보다 엄마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날이 더 많았네.
근데두 엄마.보고싶을 때가 있어.한번만,잠깐만이라도,안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어..

-어버이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고공농성 12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자 27년 해고자, 한진 조합원, 김진숙 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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