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288 - 이창근 쌍용자동차 조합원

 

 

 

20130104 서울 정동 민주노총.

20130105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건너편 주차장.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글

 

2011년에 썼던, 그러나 아직 글대로 되지 않는, 그래서 다시 버스를 탔다. [한겨레 왜냐면] 못난 아비가 아들과 함께 ‘희망열차 85호’를 탑니다 / 이창근

 


“아빠, 이거 최루액이야!”
아들 녀석이 동네 목욕탕을 나서며 내게 던진 한마디다. 쌍용자동차 파업이 끝나고 1년 가까이 지나 2010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소나기가 지나간 거리에서다. 길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고 그 가장자리에 노란색 꽃가루가 겹겹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이날 아들 녀석이 던진 이 한마디는 그 뒤 나를 깊은 고통과 죄책감으로 밀어 넣었다.

2011년 6월12일 오전, 비 내리는 부산 한진중공업. 아들 녀석이랑 얼추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추적거리는 빗물에 장난을 걸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 이 아이들이 이곳에 있게 해선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고,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렇게 힘겹게 부산을 떠났다. 그러나 생각은 부산 한진중공업을 떠날 수 없었다.

2009년 나는 파업이 끝난 직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파업 뒤 가족대책위를 맡았던 아내는 극심한 스트레스 탓이었는지 얼굴에서 고름과 진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얼굴을 하고선 처남 결혼식에도 갔다. 사위란 놈은 구속되었고, 얼굴이 흉물스럽게 변해 결혼식장에 다섯살배기 손자 녀석을 이끌고 나타난 딸을 본 아버지. 지금도 매일 안부전화를 하는, 외동딸을 끔찍이 여기는 그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라면 어떠했을까. 장인어른과 가족들의 마음에 씻지 못할 죄를 지어 염치가 바닥이다. 아니 갚을 길은 있는 것일까.

또래 아이보다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이 뛰어나 돌 때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내 아들 주강이. 파업이 한창일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재하러 온 기자와 피디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고 각종 언론 노출 빈도도 높았다. 아비 마음엔 그것이 은근히 자랑이었다. 아내는 매일 천안에서 평택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출근하다시피 공장에 들어왔다. 구속된 뒤엔 면회도 아이와 함께 왔다. 목소리만 전달되는 철창 안 단절의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 여름의 최루액을 잊지 못하는 주강이를 보면서, 파업 당시 네살이던 이 아이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그 눈에 비친 광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방패를 들고 선 전투경찰을 봤다. 아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였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아이의 눈에 비친 방패는 세상 어느 성보다 높아 보였고, 군화는 어느 장갑차보다 강하고 무서웠다.

이 폭력의 우산 속으로 아이를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내는 심리치유를 할 때마다 아이의 고통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에 온몸을 짜내며 통곡한다. 우리는 주강이를 사랑한 것인가. 사랑했다면 이렇게 해도 됐던가. 밤마다 묻는다.

그러나 어찌 주강이뿐이겠는가.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빠를 잃어버린 어린아이들, 질풍노도 사춘기에 떠나버린 엄마가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아이들.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15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아이는 몇명인가. 이 아이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몇명이 생고아의 삶을 살아가는가. ‘관계의 단절’, ‘인간관계의 파괴’라는 수사만으로 아이들의 구멍 뚫린 가슴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본과 재벌의 탐욕 때문에 발생했던 일, 아니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건조하게 말한다면, 우리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 당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고 지역 아이들의 심리치유였다. 2009년 쌍용차 파업이라는 원전이 폭발한 뒤에 우리가 맨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나. 각자 엇갈린 명분과 입장에 숨어 총질을 해대는 뒤편에서 아이들은 웅크리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너희들만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된다”는 어른들의 위로는 이 아이들에겐 외려 차가운 매질이었다. 눈물 나는 사진 한 컷 찍겠다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대던 기자들의 노력은 어떠했을까. 아이들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각인하는 숭고한 디테일이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한진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이러하다. 지금 그곳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 때문이다. 내 아들 주강이와도 같고 수많은 파업 동지들과 먼저 세상을 등진 15명 동지들의 수십명의 아이들과도 같은, 한명 한명이 모두 소중한 우리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은 보호받고 위로받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어른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아이들과 함께 놀기 위해 우리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은 ‘희망열차 85호’를 출발시킨다. 한진으로 향하는 희망열차 85호는 유쾌하고 발랄하고 산뜻하게 출발한다. 아이들을 위한 즐거운 프로그램을 알차게 준비해 적선이 아닌 존중, 소외가 아닌 중심인 아이들로 만나고 싶다. 우리는 한진중공업 사업장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싸움의 한복판, 피폭의 현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재벌과 정권의 비열함이 아이들의 유쾌함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즐겁게 놀면서 웅변될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아이끼리 어른끼리 그저 ‘와락’ 껴안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제는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쌍용차 15명의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으로 이젠 충분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최선이며 우선이다. 이것이 아비와 어미의 마음으로 한진중공업을 지켜보는 쌍용차 노동자와 아내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주강이는 10개월째 놀이치료 중이며 아직도 버스를 잘 못 탄다. 가끔씩 경찰을 보면 네살 때의 또렷한 기억을 또박또박 내게 얘기한다. 섬뜩할 정도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한진으로 이 고통이 이어져선 안 된다. 주강이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마음,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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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287 - 김정우 쌍용자동차지부장

 

 

20130104 서울 정동 민주노총.

20130105 서울 대한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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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286 - 쌍용차 고동민과 기륭 유흥희 분회장

 

 

20130105 울산 현대자동차 명촌정문 주차장 안. 머리모양으로 일어난 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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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

 

 

 

 

 

20130105 울산 현대자동차 명촌정문 주차장,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 다시 희망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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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283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20130105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앞. 다시 희망만들기.

 

강서야. 오늘은 내가 크레인에 오른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영하 13도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널 지키겠다고 했는데, 너는 가고 나는 남았다.

강서야. 네가 없어도 해는 뜨고 네가 없는 세상에서도 시간은 흘러 그렇게 16일이 지났다. 널 냉동실에 눕혀놓고 꾸역꾸역 밥을 먹는 우린 이 겨울이 참 춥다.

강서야. 재작년 겨울, 내가 출근투쟁을 할 때, 주머니에 따뜻한 음료를 넣어주던 강서야. 그때 그 두유 한 병이 참 따뜻했다는 말을 아직 하지도 못했는데 그 말을 들어줄 너는 없다. 미처 고맙다는 말을 건넬 틈도 없이 너는 출근을 했고 정리해고라는 살생부가 떨어지기 전, 그 아침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 아침처럼 아빠 다녀오시라는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는 아침을 다시 맞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

해가 뜨기도 전, 이른 아침 담배연기처럼 입김을 내뿜으며 출근을 했던 조합원들은 해고됐고, 네가 출근을 했던 문은 봉쇄되고 그 봉쇄된 문 앞엔 너의 빈소가 차려졌다. 이력서에 붙였던 사진은 영정이 되고 그 영정 앞에 다시 상복을 입은 사람들. 그 광경이 기가 막힐 뿐이다.

2003년, 네 나이 스물여섯. 그때 네가 입었던 상복을 너의 동지들이 다시 입었다. 9년 전, 그때만 하더라도 김주익이라는 사람이 왜 목숨까지 던져야 했는지, 11살, 9살, 7살 아이를 두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다 이해하긴 힘들었을 거야.

김주익 지회장을 따라간 곽재규라는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도 어려웠을 거야. 그걸로 끝이어야 했다. 다시는 이런 불행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 두 사람의 빈소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던 경영진의 사과는 진심이어야 했다. 복지관을 지어주며 화해의 손을 내밀던 그 웃음도 진심이어야 했다. 그러나 8년 만에 저들은 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둘렀고 400명이 잘렸다. 이제는 화합해야 할 때라고 말하던 그 입으로 저들은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했고 웃으며 악수를 건네던 그 손으로 복지관 건물을 하나하나 폐쇄했다.

내 전화기에는 2년만에 복직하던 날, 파이팅을 외치며 환하게 웃던 너의 사진이 남아있다. 아마도 네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웃는 모습.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공장으로 들어갔니? 살아서는 넘을 수 없었던 공장의 벽을 그렇게 넘어갔니?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도, 시퍼런 나이의 너를 열사라고 부르는 것도 우린 아직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막막하다.

네가 떠나던 날 새벽, 목이 졸리는 꿈을 꾸었다는 동순이 형님. 동생들을 살리고 싶어 크레인 위에서 40일 단식을 했던 그 형님이 십분만 일찍 사무실로 갔으면 널 살렸을 거라고 가슴을 친다. 네가 잠든 모습을 보고 깨우지 않고 출근 선전전을 나갔던 동지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상처는 아프고 깊다. 눈도 벌겋고 가슴도 벌건 채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 널 땅에 묻고 나면 그때는 소리내 울 수 있을까.

그동안 필리핀 수빅으로 수주를 다 빼돌리고 영도공장엔 4년이 넘도록 수주 한척을 못 받았던 무능한 경영진들은 이제 수주를 받을만하니 또다시 분규를 조장한다고 게거품을 문다. 끝까지 너의 죽음을 개인적인 생활고로 모욕하는 저들은 개인적인 죽음에 왜 여당대표까지 조문을 오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저들의 횡포에 졌다고 너는 말했지만 그 말이 포기가 아님을 우린 안다. 넌 누구보다 강했으니까. 넌 누구보다 의연했으니까. 그리고 넌 누구보다 따뜻했으니까.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싸우고 싶었던 네 몫까지 우리가 싸울게. 강서야.

"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로 살아간다. 내 아들 또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척박한 노동조건. 그러나 어제 하루는 광활한 우주 속 노동자의 지구를 찾은 듯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연대해 준 동지들은 하루겠지만 나에겐 미래다.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동지들. 투쟁!"

재작년 6월 12일 희망버스가 처음 다녀간 다음 날, 강서가 트위터에 남긴 글입니다. 이 추운 날 먼 길을 다시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무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이 오신 걸 알면 강서도 많이 기뻐할 겁니다. 살아서 얼싸안고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복직하는 날이라고 설레며 출근했던 그 아침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강서의 말대로 조합원들이 다시 민주노조로 돌아오고 우리 조합원들이 다시 공장에서 땀 흘려 일하게 되는 날. 그날 강서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을 끌고 가 6개월을 고문하고 하루만에 사형을 집행한 유신 때도 싸웠고, 민주노조했다고 대공분실에 끌고 가 거꾸로 매달았던 군사독재 때도 싸웠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철탑에서 노동자의 존엄성을 지키는 노동자들이 있고 그리고 이렇게 함께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목숨을 건 철탑농성을 기만하고 죽음마저 외면하는 저들과 끝까지 싸워 우리 힘으로 동지들을 내려오게 하고 강서를 편히 보내줍시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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