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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2011.03.07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고정희(1948~1991) 시인을 알게 된 시기가 분명히 기억나는 건 1991년 6월 그가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했다는 뉴스에서였다.
그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기억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수학선생님이 언급해서 또렷해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대학 때까지 꾸준히 그의 글을 만났다.
99년 제대하고 학교를 어슬렁거리다가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이 실린 시집을 찾던 중 『지리산의 봄』을 구했다.
끈끈한 생명력을 느낀다.
엎어지고 깨지고 질곡 속에 빠져들어가는 삶 속에서도 서서히 일어서는 긍정적인 힘을 느낀다.
그가 이미 세상을 떠서일까.
밝지는 않다.
약간 처연한 감도 있지만 어쨌든 땅과 흙, 어머니를 느끼게 한다.
시인의 사후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됐다는 시 <독신자>.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본 것처럼 묘사한 그 시 이야기는 참 처연해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 『지리산의 봄』, 自序 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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