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고정희(1948~1991) 시인을 알게 된 시기가 분명히 기억나는 건 1991년 6월 그가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했다는 뉴스에서였다.
그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기억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수학선생님이 언급해서 또렷해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대학 때까지 꾸준히 그의 글을 만났다.
99년 제대하고 학교를 어슬렁거리다가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이 실린 시집을 찾던 중 『지리산의 봄』을 구했다.
끈끈한 생명력을 느낀다.
엎어지고 깨지고 질곡 속에 빠져들어가는 삶 속에서도 서서히 일어서는 긍정적인 힘을 느낀다.
그가 이미 세상을 떠서일까.
밝지는 않다.
약간 처연한 감도 있지만 어쨌든 땅과 흙, 어머니를 느끼게 한다.
시인의 사후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됐다는 시 <독신자>.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본 것처럼 묘사한 그 시 이야기는 참 처연해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그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기억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수학선생님이 언급해서 또렷해졌다.
벌써 20년 전이다.
대학 때까지 꾸준히 그의 글을 만났다.
99년 제대하고 학교를 어슬렁거리다가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이 실린 시집을 찾던 중 『지리산의 봄』을 구했다.
끈끈한 생명력을 느낀다.
엎어지고 깨지고 질곡 속에 빠져들어가는 삶 속에서도 서서히 일어서는 긍정적인 힘을 느낀다.
그가 이미 세상을 떠서일까.
밝지는 않다.
약간 처연한 감도 있지만 어쨌든 땅과 흙, 어머니를 느끼게 한다.
시인의 사후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됐다는 시 <독신자>.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본 것처럼 묘사한 그 시 이야기는 참 처연해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 『지리산의 봄』, 自序 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