微破石 2009. 9. 13. 11:20
"다재다능이야말로 무서운 생의 함정이지요. 이것저것 착수를 해보면 조금씩 되거든요? 그 재미에 빠지다간 자칫 호사가가 되고 말 공산이 큽니다. 정진을 못하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다 각자 제 할 수 잇는 일의 선수가 되어야 할겁니다. 농사면 농사, 살림이면 살림, 그리고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 같은 것 말이지요. 또 교육을 맡은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나라의 번영에 앞장서는 일꾼들은 모두 이 불우한 시대의 선수들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 선수가 되어야겠습니다."

자못 수긍이 간다는 말투로 강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혁명에도 선수가 있습니까?"

강태는 어쩌면 그렇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묘한 일이지요. 선수들이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제 존재의 영역을 보다 넓고 높게 개척하는 사람들일텐데, 그 재능을 부여 받은 부분에 가장 극심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단 말입니다. 꽃이 그 아름다움 때문에 꺾이기 쉬운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축구 선수는 다리뼈 성할 날이 없고, 공을 너무 세게 맞아서 금이 가거나, 삐거나 하니까요, 달리기 잘하는 사람은 무릎 성할 날이 없지요. 넘어지는 것이 곧 달리기 선수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위험한 일이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선수는 훌륭한 것 아닐까요?"

두석의 단호한 음성에 쇳소리가 심지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이미 그때, 자신의 생에 피할 길 없이 들이닥칠 엄청난 상처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선수는 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몸을 바치는 존재지만, 그 꿈을 이루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의 잠재욕구를 대신 짊어지고 싸우는,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산간의 밤은 깊어 호젓해지는데, 두석은 결연히 말했다.

9권, 이두석의 말.

"느낌이 스치면 이미 업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9권, 도환스님의 말.

처음 만난 사이에도 오랜 지기와도 같은 낯익음이 우러나고, 십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마음이 흐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군말이 필요가 없다.

9권.

구름의 뿌리가 바위라 하던데요."
"바위를 운근이라고 하니까."
천 근 같은 바위가 어떻게 그 뭉침을 풀면 저 하늘의 구름이 되고, 형체도 정처도 없이 가벼운 저 구름이 어떻게 마음 내리면 이 무거운 지상의 바위가 되랴.

9권, 도환스님과 강호의 대화.

"오르고 내리고 칠반생을 하는 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을 겪으며 그만큼 더욱더 수행이 되어 견고한 공덕이 쌓인다는 뜻이겠지요?"
"선한 노력은 인간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향상시키고, 악한 노력은 끝없는 업을 지으니까요. 작업."
"일하는 것을 작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원은 불교에 있는 말입니다. 나를 움직여 일을 한다는 것은 곧 행위를 말하고, 그 행위가 무엇이냐에 따라 업이 다르게 지어지지요. 행위에 대한 노력이 수행이니까, 일을 한다는 말은 업을 짓는다는 말과 뜻이 같은 동의어예요."
"참, 소스라칠 사건이구만요. 그런 뜻인 줄 몰랐습니다."
등골이 떨린 강호가 놀라 전율한다.

9권, 도환스님과 강호의 대화.

도환은 뾰족한 돌멩이로 바닥에 도표를 그린다.
"이 신장들은 다 명확한 소속이 있습니다. 동방지국천왕 휘하에는 비사사와 건달바가 있는데, 비사사는 식혈육귀라, 무시무시하지요? 그런데 건달바는 참 독특한 신장이에요. 술과 고기를 일절 안 먹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이 바로 건달바거든요."
"건달바...라니, 저...무위도식하는 건달...하고는 혹시 무슨 상관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재치있게 묻는 강호한테 도환은 선선히 대답한다.
"상관이, 있습니다."
"예?"
강호가 공연히 민망하여 반문한다.
"생활 속에 널리 퍼져 뿌리가 깊던 불교 용어가 의미 전이를 일으킨 것이지요. 술과 고기를 안 먹는다는 면이 일을 안한다는 것으로,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이라는 점이 주색잡기에 빠져 빈들거린다는 것으로."
"거, 참."
"그런 말은 이 외에도 많습니다."
"조선의 오랜 숭유억불 정책이 불교에서 쓰이는 언어의 비하에 영향을 끼친 바 클 터이고, 많이 쓰여 흔해지면 높던 말이 낮아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왜."
"맞는 말씀이에요."

9권, 도환스님과 강호의 대화.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지나치게 공손한 것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는 말이니,
"무엇이든지 정도에 맞아야 어색하지 않은 법인데, 안하던 짓 하면 귀신도 놀래서 밥을 굶어."
"예?"
"너, 이런 이약 들어 봤냐?"
샛노랗게 광채 나는 놋화로에 담긴 잿불을 다둑이며 청암부인은 말했다.
"전에 어느 아무 문중에 명색 없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평생토록 뼈가 빠지게 일만 하다가 죽었더란다. 그것이 하도 서러워서 종의 자식이 불쌍한 아배 원혼을 달래 주려고, 죽어서나마 어디 양반 대접 한 번 받아보시라고, 제사 때를 당하여 무슨 수를 썼는지, 마음씨 좋은 샌님한테 통사정을 해 가지고, 신주는 감히 못 쓰니 지방 한 장 써 주시라. 필적을 얻어서는 제상을 차릴 적에, 홍동백서, 어동육서를 제가 어찌 알 것이랴. 얻어 온 과일인가, 꾸어 온 생선인가, 종놈의 신분에 정성만은 갸륵해서 상이 넘치는 것을 샌님이 기특히 여기고 한 장 자알 써서, 유우세에차아 모년 모월 모일... 낭랑하고 엄숙하게 읽었더란다."
이만하면 생전에 못 살아 본 양반의 세상을, 귀신이 되어서라도 흉내내 보았으니 여한이 없으렷다.
"샌님이 돌아가고, 종의 자식은 흐뭇하여 깊은 잠이 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꿈속에 봉두난발 머리를 풀어헤친 제 아배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나타나 두려워서 벌벌 떨며, 배가 고파 못 견디겄다. 식은 밥 한 술만 달라. 고 우는 게 아니냐."
종의 자식이 이 말에 소스라쳐 깜짝 놀라며,
"아니 아배, 이게 무슨 말씀이요, 그 맛난 떡에, 국에, 온갖 전이며 붉은 사과 흰 배, 그리고 생선, 고기, 술과 포, 식혜를 다 어쩌고, 무엇을 먹었길래 배가 고프다 하십니까... 했겄지?"
종의 아배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잔뜩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자식놈한테 하소연을 했더란다.
"말도 마라, 야야."
송췽이는 솔잎을 먹어야고, 물괴기는 물속으서 살어야는디. 이날 펭상에 넘의 집 종노릇 이골이 나서 손바닥에 굉이가 백이드락 일만 허다 죽은 내가, 오늘은 귀신이 되야 느그 집에 제삿밥 조께 얻어 먹으러 왔다가, 기절 초풍을 해서 똑 두 번 죽는 지 알었다. 느닷없이 생전에 못 먹어 보던 음석들이 울긋불긋 그뜩그뜩 채려진 제사상도 당최 나 멕기에는 낯설고 겁나는디. 내 가서 앉어야 헐 자리에는 대관절 무신 소린지 알도 못헐 먹글씨 진서로 쓴 지방이 몬야 와 터억 붙어 있길래, 나는 무섭고 주눅이 들어서 벙거충이맹이로 그 저테 차마 가들 못허고 빙빙 돌기만 했니라. 그거이 꼭 나 쫓아낼라는 부적맹이드라. 그러다 하도 배가 고파서, 머이라도 한 덤벵이 먹어 보까아... 싶드마는, 아이, 야. 그 서릿바람 호랭이 같은 샌님은 또 왜 어디로 가도 안허고 그렇게 사청왕맹이로 상 옆에 딱 버티고 서서, 사람 에러와 죽겄는디 숨도 못 쉬게, 귀신보고 이래라아, 저래라아, 점잖허신 문자를 우렁우렁 외어댄다냐이. 종놈은 본대 상전이라먼 죄 진 것도 없이 오갈이 들고, 쌍놈은 그저 양반이라먼 갓끈 비쳐도 몸썰이 나지 않냐, 왜.
그런디 상전의 샌님이 유식허게 문장 격식을 갖촤 축그장 읽어 주싱게로, 좌불안석, 몸둘 바를 몰라 나는 무색허고 횡송해서 진땀이 다 나드라. 엥게붙은 목젖에 물 한 모금 못 적시고, 저 멀고 머언 황천길을 터덕터덕 갈랑게, 배도오 고프고 다리도오 아퍼서, 가다가 기양 도로 왔다. 아이고, 나 밥 한 숟구락만 도라.
"아니, 이거이 먼 소리여, 시방."
종의 자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혼곤히 젖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훑어 닦으며,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짚신을 꿰어신고 잰걸음을 놓아 샌님에게로 내달아 갔다. 큰 일이 난 것이다. 오밤중에 들이닥친 종의 자식이 하는 말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샌님은, 그 길로 다시 종의 집으로 가, 제상을 새로 차리라고 일렀다. 헌데 이번에는 아까와 사뭇 다를 것이, 홍동백서, 어동육서는 물론 따질 것도 없어 무조건 수북수북 담아다가 아무렇게나 상 가운데 놓아두고, 떡이며 전도 귀 맞추어 모양 나게 담지 않고 마구 섞어 고깔을 만들었다. 나머지 제수며 나물들도 마찬가지로 그저 허벅지게 퍼담기만 하였다. 그리고는 지방도 모시지 않았다. 종의 자식은 이 두서없는 제상 앞에 빨깡 쪼그리고 앉아 향을 피우고 술을 따랐다. 그러자 샌님은 뒷짐을 지고 벽력같이 큰 소리로
"바우야아."
호령을 하듯이, 귀신이 된 종의 아배 생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가 딱 한 마디.
"많이 처먹어라."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휭 자리를 떠버렸다.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종놈의 제사라도 제사는 제사인데. 종의 아들은 몹시 마음이 아프고 처량도 했으나, 도리가 없어서, 그냥 밤새도록 상을 뻗대 놓고 앉았다가 새벽녘에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웬일인가. 주린 배를 갈고리같이 움켜쥐었던 아까의 얼굴은 간 곳이 없고, 어느결에 화안히 밝아진 낯색으로 웃으며 나타난 종의 아배는, 모름달같이 둥시르르 부른 배를 낙낙하게 두드렸다.
"어이, 자알 먹었다. 나는 갈란다."
"그래서 종의 자식이 크게 깨닫고, 이후로는 않던 짓은 안했더란다."

10권, 강모의 기억 속, 청암부인과 율촌댁의 대화.